박후기 시인 / 철봉은 힘이 세다
폐교에 눈 내린다
시소는 좀 더 어두운 하늘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줄 끊어진 그네는 지쳐 보였다
흐린 연필심에 침을 발라 꾹꾹 눌러 공책 위에 글을 쓰듯 하얀 운동장에 자국을 남기며 내가 걸어간다 얼어붙은 운동장이 책받침 같아 내 흔적이 땅에 새겨지지는 않는다
눈 덮인 운동장은 텅 빈 공동화장실처럼 고요하고 측백나무 울타리 아래 엉덩이를 반쯤 까고 주저앉은 폐타이어는 아직도 긴장을 간직하고 있는지 가벼운 발길질에도 탄력적으로 꿈틀거린다
나는 가볍게, 무거운 몸을 끌어올려 물음표를 한 옷걸이처럼 철봉에 턱을 걸고 매달린다 철봉은 여전히 힘이 세다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은 철봉을 향해 몸을 날렸고 더러는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맨발로 철봉 위를 걸어다니기도 했다 하루는 올가미에 목이 묶인 개 한 마리가 철봉에 느낌표로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흔들리기도 했다
눈발은 해마다 폐교를 찾아오지만 세상의 모든 졸업생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느니
어느덧 나는 어른이 되어 철봉 대신 연봉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박후기 시인 /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 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 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 새 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지구(地球)를 끌어안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수준기(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 시인 / 뒤란의 봄
그 해 가을, 지구를 떠난 보이저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단말마의 빗줄기처럼 미군부대 격납고 지붕 위에서 땅 위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2호와 나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 깨진 바가지 위로 봉분처럼 소복하게 눈이 쌓였고 주인 잃은 삽 한 자루 울타리에 기대어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마 밑 구석진 응달엔 깨진 사발이며 허리 구부러진 숟가락 土星의 고리를 닮은 둥근 곤로 받침대가 눈발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겨울의 뒤란에는 버려진 것들이 군락을 이루며 추억의 힘으로 자생하고 있었으니,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었다
눈물이 담겨 얼어붙은 빈 술병 위로 힘없이 굴뚝이 쓰러졌고 때늦은 징집영장과 함께 뒤란에도 봄이 찾아왔다 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 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 나는 캄캄한 굴뚝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註:김승옥 소설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인용
박후기 시인 /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빛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 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도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의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붉거진 핏줄이 한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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