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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제니 시인 / 너는 멈춘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5.

이제니 시인 / 너는 멈춘다

 

 

 너는 멈춘다. 횡단보도 앞에서. 철 지난 시계탑 앞에서. 사라져가는 계절의 마음 앞에서. 너는 멈춘다. 수정할 수도 있었던 틀린 맞춤법과 건너 뛸 수도 있었던 띄어쓰기와 다시 되돌아오는 긴 한숨 앞에서. 너는 멈춘다. 지나간 복도는 침울하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을 가리키고 있고. 선택지 없는 방향성만을 제시하고 있고. 계절은 바뀐다. 계절이 바뀌듯 지나간 마음도 바뀐다. 지나간 마음을 바꾸면 조금은 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는 멈춘다. 지나간 여름의 이파리들 앞에서. 쓸모를 찾아가는 사물들 곁에서. 탁자는 비어 있다. 저녁 해가 기울어가며 만들어내는 그림자 그림자들. 오래 전에 들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쓸모없음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도형 하나가 문득 제 그림자를 바꾼다. 너는 다시 멈추어 선다. 그러니까 어제 너는 불 꺼진 병실 침대 위에 누워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아침에 너는 빛이 쏟아져 내리는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서 있다. 너를 멈추어 서게 하는 힘. 너를 멈추는 것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 너무 많은 빛이 네 눈동자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너는 마른세수를 하듯 두 손 가득 빛 그물을 떠서 얼굴을 문지른다. 오래 전 두고 온 어둠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고. 열리지 않는 창문 너머로 새로운 빛이 내려앉는다고 생각할 때. 바라보지 않으면서 바라보는 눈을 가진 고양이들처럼 거리거리마다 관대한 사람들이 걸어가고. 삭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삭제되는 어제의 문장들. 한 줄 두 줄 써내려간 문장들 위로 부드럽게 붉은 줄이 그어질 때. 등지고 누웠던 너의 뒤편으로 어제의 신음소리 다시 들려오고. 이제 너는 비로소 너 자신이 되었으므로. 처음으로 너는 한 발 제대로 멈추어 선다. 비로소 너는 사람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애지》 2020년 겨울호

 

 


 

 

이제니 시인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매일 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 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 <애지> 2014년 여름호 /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 2014)

 

 


 

 

이제니 시인 /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리를 이끌었고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공허를 채우는 잔향을 따라간다. 끝없이 반복되는 잔상이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회수하여 보관한다. 거울을 마주 보고 정면을 응시한다. 바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있다.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의 한가운데에 도착합니다.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부르면서 희미하게 나아갑니다. 시간은 소리 없이 나이테에 새겨진다. 그림자 위에 또 다른 그림자를 덧씌운다. 기쁨보다 선명한 슬픔이 있다. 사람은 모두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 선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 흔들리는 피사체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미래를 두드리면서 과거를 만진다. 빛 없이 죽어 있는 얼굴이 도처에 가득하다.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 빛은 무엇인가. 꿈꾸던 얼굴을 갖고 싶어 거짓말의 형식을 차용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묻고 무엇을 춤춥니까. 그림자는 빛의 농도에 의해 질감과 명암을 달리한다. 숨겨 두었던 말을 꺼낸 이유는 경계선을 건너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신경증을 다스리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던 방어기제를 밝혀낸다. 당신의 내면은 열려 있습니까 닫혀 있습니까. 타인의 좋은 패를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은 오래전 꽃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울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떨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달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백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가능성으로 무한히 출렁입니다. 왜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요구 받은 대답을 다듬어 질문으로 돌려준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간극은 무감했던 날들을 반추한다. 과장된 음역을 흡수해서 균형감 있게 배치한다. 왜곡을 발생시키는 요소를 삭제한다. 별들이 빛납니다. 구름이 흐릅니다. 바람이 흩날립니다. 때로는 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자신을 태우면서 빛을 내는 것이 있다. 순간순간 기억을 흘려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슬픔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열어보는 서랍이 있다. 버리고 싶은 오래된 습관이 있다. 사람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 시간은 어떻게 두려움을 조작하는가. 남들과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어떤 즐거움이 있습니까. 누구도 아무도 어디로 가라고 일러주지 않습니다. 고유한 목소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형태와 질감에 다가가야 합니다. 분산하고 발산하는 빛을 상상 속에서 재현한다. 더 깊은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도 좋습니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더 깊은 바닥으로 헤매어도 좋습니다. 죽어가는 방식으로 피어나는 꽃을 건네준다. 잠재된 감정의 잠정적인 속삭임을 주시한다. 떠오르기를 기다려 만나게 되는 장면은 오래전 어머니의 뒷모습이다. 한 발 한 발 하루하루씩 살아가라고 말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내면의 목소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기로 합니다.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들의 역사는 회고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상의 그림자로부터 대상을 분리한다.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떠맡은 역할로부터 벗어난다. 무관한 단어들 속에서 사물의 이름과 존재의 환영이 자리를 뒤바꾼다. 자리 없는 마음 대신 피어 있는 꽃을 만진다. 낯선 목소리 사이로 피어나는 얼굴이 있다. 어둠의 경계 너머로 스며드는 기억이 있다. 가볍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고 복원력이 뛰어납니다. 닫혀 있던 선분이 열리고 있다. 경계 없는 목소리로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의 한가운데에 도착합니다.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부르면서 희미하게 나아갑니다. 제자리걸음이어도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문장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마지막 문장은 날개로 펼쳐진다. 미래를 두드리면서 과거를 만든다. 세계의 입구가 열리고 있다. 숨소리 뒤에 들려오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제니 시인 / 구름에서 영원까지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자국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들판으로 모여 들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때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검은 조약돌.나는 네게 주었던 것은 하얀 모래알. 바다는 오늘도 그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돌의 얼굴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돌의 마음은 주머니 속에 놓여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너의 목소리. 바닥으로 번져나가며 너의 목소리. 물결은 왔다가 갔다. 울음은 갔다가 왔다. 바람은 돌이킬 수 없었다. 고양이는 노래를 훔쳤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희망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이름뿐이다. 나의 이름 위에 너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너의 이름 위에 돌의 마음을 올려 두었다. 발자국소리는 침묵 뒤에 다가왔다. 노래를 부르면서 말없이 흔들렸다. 빛은 어둠을 감추며 언덕으로 달려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돌의 마음. 네가 내게 주었던 것은 검은 조약돌. 너는 너의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나의 이름을 감추었다. 우리의 이름 위로 우리의 그림자가 흘러갔다. 구름이 나를 나무랐다. 나무가 바람을 뒤덮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물결 뒤에는 조약돌만 남았다. 약속은 남은 사람 혼자 간직했다. 바람은 구름 뒤로 사라졌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영원을 보았다고 믿었다.

 

 


 

이제니 시인

1972년 부산에서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페루〉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아마도 아프리카』(창비, 2010),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모르고』『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가 있음. 제21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제2회 김현문학패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