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 시인 / 지구에 처음 온 짐승처럼
설사는 급하고 화장실은 보이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다급할까 지옥에서 오는 길이 이렇게 몸서리칠까 허리는 뒤틀리고 다리는 꼬이는데 문득 밟히는 개똥 한 무더기! 아, 이 똥의 주인은 이미 해탈했겠구나 온몸이 괄약근이 되어 전생의 업까지 깨끗이 비웠겠구나 말아 올린 꼬리 밑으로 지옥의 입구를 환히 드러내놓고 사거리 빨강신호등 아래를 유유히 건넜겠구나 무단으로 건넜겠구나 보란 듯이 보란 듯이 불법(不法)뿐인 세상을 똥개처럼 개똥처럼 건넜겠구나 불법(佛法)으로 건넜겠구나 도대체 나는 지구의 어디에 쭈그리고 앉아야 맘껏 나를 쏟아버릴 수 있을까 신발에 튄 나를 가로수 밑동에 스윽 문대고는 저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널 수 있을까 무단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똥을 한 번도 참아본 적이 없는 짐승처럼
김남호 시인 / 저기, 시커먼
저기, 시커먼 개썰매 온다 저기, 홀쭉한 산타 온다
산타는 심심하지 노래는 심심하지 불러도 불러도 심심하고 자루 속의 호랑이는 칭얼거리지
떡 하나 줘도 잡아먹고 떡 하나 안 줘도 잡아먹는 이빨 빠진 개호주
개썰매는 지긋지긋하지 담배 피는 호랑이는 지긋지긋하지
고개 하나 넘으면 손 하나 잘리고 또 고개 하나 넘으면, 저기 첩첩 고개들이 개떼처럼 몰려온다
어디까지 왔니? 발 하나 잘리고 어디까지 왔니? 무릎 하나 잘리고 어디까지 왔니? 불알 하나 잘리고
어디까지 왔니?
김남호 시인 / 엘리베이터
많은 밤을 기다릴 것도 없어, 당장 오늘밤이라도 좋아
그거 별거 아냐 눈감고 열을 세는 동안 끝날 거야 아프냐고? 가렵지는 않아 무섭냐고? 상상하기 나름이야 그 다음은 어떠냐고? 그건 그 다음의 일일 뿐이지
나는 이층침대를 써 내 잠 위에 누군가의 잠이 포개진다는 거 혹은 내 죽음 아래 누군가의 꿈이 밟힌다는 거 왼쪽 가슴께가 갑자기 스멀거리지 않니?
담쟁이덩굴이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어 이쪽 벽과 저쪽 벽을 달리는 덩굴의 속도가 다르대 그건 벽에도 제한속도가 있다는 거지 징검다리를 건널 때의 속도? 그건 담쟁이에게 물어봐
쉿! 짧은마디늑대거미가 지금 이층 침대로 올라가고 있어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
김남호 시인 / 소금기도 없이
식은땀은 무섭다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처럼 무섭다 영혼이 빠져나갈 수 없는 몸뚱이처럼 무섭다 선뜩하게 와 닿는 비수의 끝, 조용히 내리긋는다 겨드랑이에서 옆구리로 소금기도 없이
김남호 시인 / 달마야 놀자
눈을 찔러야 눈이 찔려야 겨우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한번 울려면 석 달 열흘 눈가에 불을 지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이 마지막으로 보는 건 자신의 노을이겠구나 불티 같은 노을이겠구나 그래서 바싹 마른 눈으로 멀뚱멀뚱 그 뜨거운 풍경을 바라보겠구나 바라만 보겠구나 싶은 사람이 있었다 서쪽 마루에 걸터앉아 마른걸레 한쪽으로 노을의 가장자리를 꾹꾹 누르며 다른 쪽으로 달의 이마를 훔치는 사람이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찌를 눈이 없어서 더 이상 찔릴 눈이 없어서 마음 놓고 펑펑 저물지도 못하겠구나 머리끝까지 끌어당길 어둠이 없어서 저녁을 맞을 수도 없겠구나 싶은 사람이 있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니 시인 / 너는 멈춘다 외 3편 (0) | 2021.11.05 |
---|---|
김지율 시인 / 멀리서 온 책 외 4편 (0) | 2021.11.05 |
문재학 시인 / 삶의 찬미(讚美) 외 5편 (0) | 2021.11.04 |
마해성 시인 / 그윽한 오월 (0) | 2021.11.04 |
박후기 시인 / 철봉은 힘이 세다 외 3편 (0) | 2021.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