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 시인 / 멀리서 온 책
발이 아주 큰 사람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질문이 끝나면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고 이 겨울은 아주 오래 추웠습니다 밖에는 며칠째 눈이 내리고 헌 오리털 잠바를 수선하러 갔습니다 주인은 잠바를 자르는 순간 날리는 털 때문에 고칠 수 없다더군요 빠르게 결론을 내리면 한 번에 끝낼 수 있었을까요 당신을 보내고 읽은 오독의 문장들이 빛나는 저녁입니다 이 문장과 진술 뒤의 굴욕으로 나는 나의 악몽입니다 訃音입니다 종이 끝에 베인 손가락으로 벌린 제 항문의 시작과 끝은 여기까집니다 뛰어내릴 빈 곳이 어디에도 없어요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몸속으로만 울다 죽은 사람들 나는 당신의 피 묻은 책이 두렵고 미쳐 도망간 자들과 추방된 자들 사이에서 늘 쫓기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 본 얼굴과 말이 없었던 사람들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왜 그렇게 살고 있느냐는 말 어디쯤에서 뜨거워져야 하는지 한 장씩 찢은 책을 삼킬 때마다 또 묻습니다 그때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과 생략된 문장은 같은 뜻인지 자신을 다 버린 자들과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사람들의 기록은 어디에서 끝나는지, 나는 귀신을 쫓아 준다는 부적을 붙이고 꽃잎처럼 가벼워졌는데
김지율 시인 / 국경모텔 사마리아
안개와 북소리는 서로 불친절하다 곤충의 눈으로 당신은 사마리아를 지나 모텔 문을 연다 우리는 지워진 한 개의 이름이다 종일 밤이거나 어디에도 없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엄마가 다른 어여쁜 형제라네
뜨겁다는 말을 세 번 줄여서 어서 와서 자, 라고 썼지 손톱 밑으로 여전히
; 기차가 지나간다 마지막 문장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잠들기 전에는 삼키거나 깨물지 말아야지 아름다운 항문처럼 후회가 많은 날, 바깥엔 나무들이 넘쳤다
바깥보다는 안이 더 뜨겁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당신의 표적이자 주먹이다 학살자들이 풍장 시킨 밤들이 사마리아를 지나 모텔로 모여 든다 당신의 나라를 지나 이상한 악몽을 지나간다. 그때 누군가 등을 스쳤다
; 세 번째 그림자가 흔들렸다 우리는 같은 꿈속에서 당신을 지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벌써 잊었지만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
우리는 엄마가 다른 어여쁜 형제 그리고 여행이 시작 되었다네
김지율 시인 / D
나에게 오렌지는 세 개다 아니 네 개일 때도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당신의 상자 속에 얼마만큼의 오렌지가 있는지 빨간 팬지나 체조선수들은 오렌지가 몇 개 필요한지
문예지에 실린 모르는 당신은 오렌지가 많아 아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달리는 트럭에 깔려 박살난 오렌지의 기분이 들 때,
혹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충분하고 윤리적인 잠을 자거나 일기를 쓰면서 누구에게 한 표를 주어야 할지 생각하지만,
오렌지를 다섯 개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솔직히 옥상보다 화장실에서 더 자주 바뀌고 세 번째 보다 네 번째가 더 좋았다는 말은 모두 오렌지 때문이다
무서워서 도망치는 오렌지의 꿈을 꾼 어젯밤, 당신의 순간들에는 몇 개의 오렌지가 있었나
이런 시대에 오렌지를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렌지 때문에 깃발이 흔들리고 옥수수가 익는 건 사실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뺨이 뜨거울 정도로, 웃거나 울겠지만, 8층에서 3층으로 ,당신과 당신에게, 세 시에서 네 시로
김지율 시인 / 게스트 하우스-줄탁동시
목록 1 바람개비가 돈다 노랗게 돈다 원근 처리가 되지 않는 밤이다 조금은 다른 유형의 개와 늑대의 진화처럼 어금니가 뿌리 채 흔들린다 노랑은 기표 검정은 기의 밧줄은 한 번도 자신이 밧줄이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으므로 밧줄이 된다 이곳은 꿈속이 아니다 실존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밧줄에 오래오래 매달리는 것 허공과 진공사이 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다리 네 개가 축 늘어졌다 열한시 십육 분 삼십오 초 복숭아 냄새가 났다
목록 2 더 이상 발이 뜨거워지지 않자 아버지는 신발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제부터 없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는 내 꿈을 모두 쇠망치라 했다 나는 물고기가 되지 못했지만 바다는 넓고 조용했다 아버지의 직업은 춘곤증 혹은 딱정벌레 눈 속에 돌이 들어가 충혈 된 순간을 '네 꽃잎은 너무 예뻐'라고 했다 층층 눈물이 났다 울고 있는 네 살을 핥으면 왜 짠 맛이 났을까 밀실에 살충제를 뿌렸다 굴뚝에서 시꺼먼 연기가 올라왔다 버스가 지나가고 총을 든 군인이 다가왔다
목록 3 수돗물에서 소독약 냄새가 난다 네가 미치게 보고 싶어 양치질을 세 번이나 했다 아버지 나는 왜 귀가 없어요? 걱정 마, 엄마는 여전히 젊고 예쁘고 우린 모두 자웅동체(雌雄同體)잖니 노래는 끝나가고 눈사람처럼 시간이 없다 우리의 신앙은 어린 소녀와 죽음* 네 얼굴을 열면 언제나 내가 있다 이제 그만하자를 문장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56892번째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언은 아직 살아있습니까?
* 피에르 알레친스키 作
김지율 시인 / 스토리텔링
이것은 숨어사는 헬멧이야기(딱 한번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 태어날 때부터 헬멧이었던(다시 태어나면 기린이 될 거야) 잘 때도 헬멧을 쓰고 자는(얼굴이 까만 아이들의 눈은 서로 닮았잖아) 뛰어라 헬멧이야기(세 번째 얼굴과 하얀 이빨은) 모든 것은 헬멧으로 통했고 (모른 척 지나치긴 너무 가깝고) 어느 날, 또 다른 헬멧이 나타났다(어깨를 두드리긴 너무 멀어) 내가 진짜 헬멧이야, 넌 꺼져(첫 번째 얘기를 빼먹었어, 다시 할까) 헬멧이 헬멧을 치고 박고(금요일에 죽어 일요일에 다시 태어난다면) 헬멧이 헬멧에 부딪쳐 자빠지고 나가떨어지자(아버지는 분명 모자가 되었을 거야) 이윽고 헬멧이 왕창 깨져버린 이야기(나는 네 입술보다 손을 더 믿어) 시꺼먼 먹물이 길바닥에 낭자한 이야기(그러니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그러자, 또 다른 헬멧이 나타났다 (아프리카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다음 이야기는 10분, 쉬었다 해 줄게(이제부터 똑바로 말해)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남호 시인 / 신부들은 왜? 외 5편 (0) | 2021.11.05 |
---|---|
이제니 시인 / 너는 멈춘다 외 3편 (0) | 2021.11.05 |
김남호 시인 / 지구에 처음 온 짐승처럼 외 4편 (0) | 2021.11.04 |
문재학 시인 / 삶의 찬미(讚美) 외 5편 (0) | 2021.11.04 |
마해성 시인 / 그윽한 오월 (0) | 2021.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