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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율 시인 / 멀리서 온 책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5.

김지율 시인 / 멀리서 온 책

 

 

 발이 아주 큰 사람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질문이 끝나면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고 이 겨울은 아주 오래 추웠습니다 밖에는 며칠째 눈이 내리고 헌 오리털 잠바를 수선하러 갔습니다 주인은 잠바를 자르는 순간 날리는 털 때문에 고칠 수 없다더군요 빠르게 결론을 내리면 한 번에 끝낼 수 있었을까요 당신을 보내고 읽은 오독의 문장들이 빛나는 저녁입니다 이 문장과 진술 뒤의 굴욕으로 나는 나의 악몽입니다 訃音입니다 종이 끝에 베인 손가락으로 벌린 제 항문의 시작과 끝은 여기까집니다 뛰어내릴 빈 곳이 어디에도 없어요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몸속으로만 울다 죽은 사람들 나는 당신의 피 묻은 책이 두렵고 미쳐 도망간 자들과 추방된 자들 사이에서 늘 쫓기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 본 얼굴과 말이 없었던 사람들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왜 그렇게 살고 있느냐는 말 어디쯤에서 뜨거워져야 하는지 한 장씩 찢은 책을 삼킬 때마다 또 묻습니다 그때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과 생략된 문장은 같은 뜻인지 자신을 다 버린 자들과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사람들의 기록은 어디에서 끝나는지, 나는 귀신을 쫓아 준다는 부적을 붙이고 꽃잎처럼 가벼워졌는데

 

 


 

 

김지율 시인 / 국경모텔 사마리아

 

 

안개와 북소리는 서로 불친절하다 곤충의 눈으로 당신은 사마리아를 지나 모텔 문을 연다 우리는 지워진 한 개의 이름이다 종일 밤이거나 어디에도 없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엄마가 다른 어여쁜 형제라네

 

뜨겁다는 말을 세 번 줄여서 어서 와서 자, 라고 썼지 손톱 밑으로 여전히

 

; 기차가 지나간다 마지막 문장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잠들기 전에는 삼키거나 깨물지 말아야지 아름다운 항문처럼 후회가 많은 날, 바깥엔 나무들이 넘쳤다

 

바깥보다는 안이 더 뜨겁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당신의 표적이자 주먹이다 학살자들이 풍장 시킨 밤들이 사마리아를 지나 모텔로 모여 든다 당신의 나라를 지나 이상한 악몽을 지나간다. 그때 누군가 등을 스쳤다

 

; 세 번째 그림자가 흔들렸다 우리는 같은 꿈속에서 당신을 지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벌써 잊었지만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

 

우리는 엄마가 다른 어여쁜 형제 그리고 여행이 시작 되었다네

 

 


 

 

김지율 시인 / D

 

 

나에게 오렌지는 세 개다 아니 네 개일 때도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당신의 상자 속에 얼마만큼의 오렌지가 있는지 빨간 팬지나 체조선수들은 오렌지가 몇 개 필요한지

 

문예지에 실린 모르는 당신은 오렌지가 많아 아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달리는 트럭에 깔려 박살난 오렌지의 기분이 들 때,

 

혹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충분하고 윤리적인 잠을 자거나 일기를 쓰면서 누구에게 한 표를 주어야 할지 생각하지만,

 

오렌지를 다섯 개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솔직히 옥상보다 화장실에서 더 자주 바뀌고 세 번째 보다 네 번째가 더 좋았다는 말은 모두 오렌지 때문이다

 

무서워서 도망치는 오렌지의 꿈을 꾼 어젯밤, 당신의 순간들에는 몇 개의 오렌지가 있었나

 

이런 시대에 오렌지를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렌지 때문에 깃발이 흔들리고 옥수수가 익는 건 사실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뺨이 뜨거울 정도로, 웃거나 울겠지만, 8층에서 3층으로 ,당신과 당신에게, 세 시에서 네 시로

 

 


 

 

김지율 시인 / 게스트 하우스-줄탁동시

 

 

목록 1

바람개비가 돈다 노랗게 돈다

원근 처리가 되지 않는 밤이다

조금은 다른 유형의 개와 늑대의 진화처럼

어금니가 뿌리 채 흔들린다

노랑은 기표

검정은 기의

밧줄은 한 번도 자신이 밧줄이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으므로 밧줄이 된다

이곳은 꿈속이 아니다

실존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밧줄에 오래오래 매달리는 것

허공과 진공사이

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다리 네 개가 축 늘어졌다

열한시 십육 분 삼십오 초

복숭아 냄새가 났다

 

목록 2

더 이상 발이 뜨거워지지 않자 아버지는 신발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제부터 없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는 내 꿈을 모두 쇠망치라 했다

나는 물고기가 되지 못했지만 바다는 넓고 조용했다

아버지의 직업은 춘곤증 혹은 딱정벌레

눈 속에 돌이 들어가 충혈 된 순간을 '네 꽃잎은 너무 예뻐'라고 했다

층층 눈물이 났다

울고 있는 네 살을 핥으면 왜 짠 맛이 났을까

밀실에 살충제를 뿌렸다

굴뚝에서 시꺼먼 연기가 올라왔다

버스가 지나가고 총을 든 군인이 다가왔다

 

목록 3

수돗물에서 소독약 냄새가 난다

네가 미치게 보고 싶어 양치질을 세 번이나 했다

아버지 나는 왜 귀가 없어요?

걱정 마, 엄마는 여전히 젊고 예쁘고 우린 모두 자웅동체(雌雄同體)잖니

노래는 끝나가고 눈사람처럼 시간이 없다

우리의 신앙은 어린 소녀와 죽음*

네 얼굴을 열면 언제나 내가 있다

이제 그만하자를 문장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56892번째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언은 아직 살아있습니까?

 

* 피에르 알레친스키 作

 

 


 

 

김지율 시인 / 스토리텔링

 

 

이것은 숨어사는 헬멧이야기(딱 한번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

태어날 때부터 헬멧이었던(다시 태어나면 기린이 될 거야)

잘 때도 헬멧을 쓰고 자는(얼굴이 까만 아이들의 눈은 서로 닮았잖아)

뛰어라 헬멧이야기(세 번째 얼굴과 하얀 이빨은)

모든 것은 헬멧으로 통했고 (모른 척 지나치긴 너무 가깝고)

어느 날, 또 다른 헬멧이 나타났다(어깨를 두드리긴 너무 멀어)

내가 진짜 헬멧이야, 넌 꺼져(첫 번째 얘기를 빼먹었어, 다시 할까)

헬멧이 헬멧을 치고 박고(금요일에 죽어 일요일에 다시 태어난다면)

헬멧이 헬멧에 부딪쳐 자빠지고 나가떨어지자(아버지는 분명 모자가 되었을 거야)

이윽고 헬멧이 왕창 깨져버린 이야기(나는 네 입술보다 손을 더 믿어)

시꺼먼 먹물이 길바닥에 낭자한 이야기(그러니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그러자, 또 다른 헬멧이 나타났다 (아프리카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다음 이야기는 10분, 쉬었다 해 줄게(이제부터 똑바로 말해)

 

 


 

김지율 시인

1973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09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 국립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후 동 대학에서 강의 중. 저서로는 시집으로 『내 이름은 구운몽』(한국문연, 2018)과 시인과의 대담집 『침묵』, 詩네마 산문집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들』과 학술 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근대성과 미적 부정성』이 있음. 2013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형평문학’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