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호 시인 / 신부들은 왜?
오늘은 토요일, 또 누군가의 결혼식 내 다리는 틀림없이 둘인데 왜 바짓가랑이는 하나거나 셋인가
저 사내가 내미는 손을 잡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호주머니 속에서 내 손을 세고 있는 사이 폭설처럼 쌓이는 하얀 봉투들
나도 한때 저 많은 편지들을 밤새워 읽은 적이 있지 턱을 덜덜 떨어가며 기침을 꾹꾹 참아가며 그런데도 저 늙은 신부는 왜 나를 모른체하는가
지금은 건기 지나고 다시 건기,
신랑들은 깡통을 끌고 떠난 지 오랜데 신부들은 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가 저 얼음 봉투 속에서
김남호 시인 / 롱 키스 굿나잇*
다시, 차창이 내려가고 여자의 손이 차창 밖으로 뻗어나온다
나부끼는 여자의 손을 남자가 달려가서 붙잡는다 입술이 입술을 더듬는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붙잡은 손과 손이 얽힌 혓바닥과 혓바닥이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늘어나던 혓바닥이 가장 달콤한 지점에서 툭, 끊어진다
묶인 줄이 끊어지자 차는 순식간에 우주 속으로 날려가 버리고 남자는 피시식 꺼져버린다
다시, 불이 켜지고
늘어난 혀를 둘둘 말아서 입속으로 밀어 넣고 나는 우주 밖으로 나온다
*롱 키스 굿나잇(The Long Kiss Goodnight) : 레니 할린 감독의 영화
김남호 시인 / 당신이 입을 다물었을 때
나는 내 입속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입속에서 책 보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입속에서 전화하고 신문 보고 욕하고 침 뱉고, 자장면도 입속으로 배달시키고 빈 그릇은 신문지로 둘둘 싸서 입 밖에 내놓았습니다 해는 왼쪽 어금니 근방에서 떠서 오른쪽 어금니로 지고 저녁 무렵이면 마르다 만 빨래가 송곳니에 걸려서 휘파람처럼 나부꼈습니다 가을이 가고 여름이 가도 내입에서 당신 입으로 이어진 길들은 여전히 끊어졌고 겨우내 내 이름만 불렀습니다 내 입으로 불려지는 내 이름은 낯설었습니다 그만 나를 캭, 뱉어버리고 싶어서 두어 번 가래를 돋운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것도 다 지난 일, 지금은 뱉어질까 두렵습니다 이 구중궁궐(口中宮闕)에서
김남호 시인 / 고추잠자리라고 부를까?
급하게 벗어던진 꽃무늬 팬티도 아니고 맞을수록 어긋나는 회초리 자국도 아니고 발기한 지렁이도 풀죽은 티라노사우루스도 아니고 얼레리꼴레리 꼴릴 대로 꼴려서 제 대가리에 제 성기를 쑤셔 박으며 피터지게 불꽃놀이 하는
저 아찔한 흘레를
김남호 시인 / 만종
둥근 종소리가 저녁강을 건너오면 어머니는 동그랗게 등을 말고 이름을 쓰네 밀린 숙제를 하듯이 방바닥에 엎드려 이름을 쓰네 연필 끝에 침을 묻혀 오래 전에 죽은 형들의 이름을 쓰네 두 살 때 죽은 여섯 살 때 죽은 마흔 일곱에 죽은 형들의 이름을 차례로 쓰네 어쩌자고 저들을 불러오는가, 나는 귀를 틀어막고 종소리를 온몸으로 밀어내네 천근의 종소리는 끄떡도 않고 느릿느릿 강을 건너오고 돌을 갓 지난 형과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형과 오십을 바라보는 형이 차례차례 강을 건너오고 어둠이 출렁이는 방바닥에 엎드려 어머니는 느릿느릿 또 이름 하나를 쓰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침으로 쓰네 나도 처음 보는 내 이름을 쓰네
김남호 시인 / 편식하는 고양이
오른쪽 뺨을 때린 자에게 왼쪽 뺨도 대주어라!
(너의 새해 운세는 왼쪽 뺨에 있었군)
이건 뺨도 신발이나 장갑처럼 한 짝만으로는 쓸모가 없다는 말씀?
(아니면 한쪽을 건드린 놈에게 나머지 쪽도 물려야 한다는 자해공갈단의 강령?)
어쨌거나 지금은 붉은뺨멧새 두 마리가 마주보고 서로가 서로의 뺨을 번갈아 때리는 친화의 시간
제 발바닥에 침을 묻혀 제 뺨을 피가 나도록 문지르는 그루밍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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