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시인 / 유리의 눈
병이 깨지자 자잘한 유리들이 발톱을 세웠다
둥글고 매끄럽던 세계가 뾰족한 가시의 숲으로, 투명하게 이지러진 팔차원의 흉기로 변한다
따끔거리는, 사물의 모든 흉곽이 뒤집어진, 어둠이 밝음으로. 구체가 수직으로 곤두선, 태양 반사광이 시린 실명의 빛으로 거듭나는, 세계의 숨은 그림
병의 더 깊은 형태는 자디잔 유리알들의 난반사다 지워진 너는 그곳에서 더 빛났다
하나에서 천 마디 만 마디로 분절된, 유리의 눈으로
― 시집 『귀신』(문학동네, 2014)
강정 시인 / 자멸의 사랑
조용히 내 말에서 귀를 거두시오 내 말이 불현듯 낙뢰를 타고 창가에 부서질 때, 그 부서지는 시간의 피톨들이 정녕 당신이 들어야 할 소리인지도 모르오
내 말을 믿지 마시오 차라리 내가 사레들려 헛기침을 하거나 당신이 애써 감추려는 피부의 작은 돌기를 도적마냥 쳐다볼 때면 그제서야 당신은 손톱만큼만 나를 믿어도 괜찮소 나는 거짓을 그리는 우매한 소경이라오
내가 본 것들을 믿지 마시고 내가 그린 것은 더욱 믿지 마시오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만 겹의 얼굴 뒤에 불온한 얼룩으로 묻은 시간의 고름일 뿐이오 나를 믿느니 속옷에 묻은 당신의 부끄러운 땀 냄새나 오래 바라보시오
내 얼굴이 문득, 꿈에 본 당신의 속마음으로 읽힌다면 만 권의 책을 덮고 오래 켜둔 불빛을 잠그시오 어둠 속에서 만개하는 그림들이 지평선을 바꾸는 순간, 당신은 어디에도 없는 나의 유일한 그림자라오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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