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우 시인 / 미로
미끄러운 손을 가졌지만 아주 빠른 직감을 지녔습니다 부서지는 것, 예감은 공포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의 아픔
꿈꾸던 목장에는 여린 풀을 고르는 양 떼의 콧김과 첼로를 연주하던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 멀리, 나부끼는 이국의 파란 깃발 젖은 신발을 말리는 작은 벽난로가 있었겠지만
눈을 뜨면 밤이 밀려옵니다
목적이 없는 연락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몇 번을 썼다 지운 글자들이 손톱 밑을 새카맣게 물들일 때
영혼을 강요하고 있나요 누가 누구에게 미궁을 베풀고 있나요
악의가 없다는 말에 악의를 느낄 때 우리의 푸른 초장은 모두 불탔습니다
이제 그만, 인간의 입구를 닫겠습니다 이곳을 넘어오지 마십시오
저 멀리, 집을 떠나 걷는 사람의 그림자는 어두운 칼이 되어 길 위를 계속 긋고 있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최현우 시인 / 발레리나
부슬비는 계절이 체중을 줄인 흔적이다 비가 온다, 길바닥을 보고 알았다 당신의 발목을 보고 알았다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이 넘어졌다 일어나는 몸짓이 처음 춤이라 불렸고 바람을 따라한 모양새였다 날씨는 가벼워지고 싶을 때 슬쩍 발목을 내민다 당신도 몰래 발 내밀고 잔다 이불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듯이 길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침에 보니 당신의 맨발이 반짝거린다 간밤에 어딘가 걸어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한다 맨발로 춤을 췄다고 한다 발롱*! 더 높게 발롱! 한 번의 착지를 위해 수많은 추락을! 당신이 자꾸만 가여워지고 있다
*발레의 점프 동작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에 당선시
최현우 시인 / 끝나지 않는 겨울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세상이 떨고 있었다
커피 속에서 물의 입자들이 증발하고 자꾸 입김이 나왔다 탁자 위에서 휴대폰이 진동한다 오지 않을 당신은 위독하다
혼자 담배를 피우는 건너편 여자는 흔들린다 바닥에 어깨가 떨어진다
창문 밖 벚꽃나무가 가렵다는 듯이 가지를 턴다 가라앉는 저녁과 떠오르는 도시 사이 불빛이 가루가 되어 쓸려 다닌다
문이 열릴 때마다 커피를 쏟을 뻔 했다 서둘러 빈 잔을 만든다 자리에서 잠깐 일어났을 때 코피가 흘러내리고
바깥보다 안쪽이 조금 더 뜨거워지는 시간
새로 따른 냉수는 떨지 않는다
최현우 시인 / 총알개미장갑
나는 사테레 마우에족의 남자. 스무 번의 성인식을 치르네. 개미장갑을 만들어 손을 집어넣는다네. 그 고통은 녹슨 못을 몸으로 받는 일, 담뱃불로 사타구니를 지지는 일과 같네. 의식을 치르는 동안 한 줌의 신음도 흘려서는 안 된다네. 일 년에 한 번, 이십 년을 치러야 사냥에 나가는 손이 되네. 어른이 된다네.
우리는 울지 않네. 독침보다 무서운 건 눈물이라지. 멧돼지를 잡을 때나 악어와 싸울 때, 식구가 죽을 때를 위해 스무 번을 미리 운다네. 우리는 안다네. 질병보다 먼저 피에 독을 흘려두는 일,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운다네. 싸우다 죽어도 우리의 시체를 핥는 적들은 고통스럽게 죽는다네.
바다가 되어버린 친구를 봤네. 그는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렸네. 미처 장갑을 벗지 못했지. 눈보다 손이 먼저 부어버렸네. 아무것도 만질 수 없었네. 울면서 떠났다네. 오랫동안 기다리다 떠났네. 그가 흘린 그림자를 만졌다가 나는 그만 죽어버렸네.
사테레 마우에족은 개미장갑을 끼우기 전에 돌고래를 만지게 하네. 죽어버리지 않도록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온다는 분홍색 돌고래를 만져야 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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