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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상 시인 / 카페테리아의 태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5.

이길상 시인 / 카페테리아의 태양

 

 

고요한 실내에 거리의 태양이 뜨고

무서운 암투가 진행되었다

 

한쪽 구석에서

이어폰을 꽂는 내가 홀로 다정하다

그런 나를 느끼는 내 주위로

빨리 찾아오는 어둠

 

표정 하나 굳지 않고 창밖 외등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음식으로 채울 수 없는 허기다

나를 잘 아는 몸의 온기는

먼 길에서 데워지고

 

존 레논이 암살되기 전

이미 우리들이 그를 죽인 건 아닐까

 

홀로 앉아 눈을 감듯 저녁 등불을 보면

도서관 지붕이 세상 밖에서 펄럭이고 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초침소리가 아침 햇살을 밀고 있다

 

치기처럼 튀어나온 세상이라는 말이

조금씩 서러워질 때

삶에 기댄다

 

고요한 실내에

거리의 테러와 암거래가 있었다

커피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

우린 존 레논을 죽였다

 

물통 속 얕은 물을 보면

온몸이 아프다

 

 


 

 

이길상 시인 / 저 연꽃

 

 

초여름

퇴근길, 모처럼 땀을 닦지 않았다

승우반점에서

창밖을 본다

 

해는 길고

묵묵히 앉아 있어도

뭔가 밀려오고 있다는 느낌 그때 보이는 저 연꽃

 

더는 자극할 것도 없는 빌딩들 사이로

작은 연꽃들 가만히 눈에 들어오고

응시할수록

더 아리게 파고드는 꽃

별 게 아닐수록

잔인하게 파고드는……

파고들어

더 먼, 작은 연꽃으로 보이는가

 

아무렇지도 않아서

밀려오는 이 슬픔

바람 저편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을 거다

 

작게 핀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저녁 생각할수록

무더위가 몰려오고

연잎, 그 무더운 초록이 내 눈에 피어올랐다

 

 


 

 

이길상 시인 / 파필리온 컬렉션*

 

 

내 서가에는

책들과 클래식 시디 몇 장 꽂혀 있다

나비는 시디 재킷에 박혀 있고

오늘은 베토벤의 ‘합창’

 

나비에

명암이 적절하게 드리워진다

드리워지지 않은 듯 드리워진 명암

내 눈은 세상의 수많은 얼굴들로 가득 차 보인다

모든 걸 보고 싶기도 보기 싫기도 했으므로

명암은 항상 깔리고 있다

하여 당연한 듯

내 손에 그 음반은 들려 있고

이 순간은 시간이 아니라

동굴이다

모든 세기가 통과한다

통과하고도 통과한다

 

햇살을 받은 재킷이 화사하다

그어진 빛줄기는 이때까지의 나를 잘 알고 있으리라

살 수 있는 것들만

역사가 되고

 

나비 날개의 색은 그걸로 충분했다

잡힐 듯 더 멀어지는 얼굴들만 가득 찬다  

 

*파필리온 컬렉션: 클래식 명곡이 담긴 음반. 그 재킷엔 나비가 그려져 있다.

 

 


 

이길상 시인

1972년 전주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와 同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및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