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상 시인 / 카페테리아의 태양
고요한 실내에 거리의 태양이 뜨고 무서운 암투가 진행되었다
한쪽 구석에서 이어폰을 꽂는 내가 홀로 다정하다 그런 나를 느끼는 내 주위로 빨리 찾아오는 어둠
표정 하나 굳지 않고 창밖 외등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음식으로 채울 수 없는 허기다 나를 잘 아는 몸의 온기는 먼 길에서 데워지고
존 레논이 암살되기 전 이미 우리들이 그를 죽인 건 아닐까
홀로 앉아 눈을 감듯 저녁 등불을 보면 도서관 지붕이 세상 밖에서 펄럭이고 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초침소리가 아침 햇살을 밀고 있다
치기처럼 튀어나온 세상이라는 말이 조금씩 서러워질 때 삶에 기댄다
고요한 실내에 거리의 테러와 암거래가 있었다 커피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 우린 존 레논을 죽였다
물통 속 얕은 물을 보면 온몸이 아프다
이길상 시인 / 저 연꽃
초여름 퇴근길, 모처럼 땀을 닦지 않았다 승우반점에서 창밖을 본다
해는 길고 묵묵히 앉아 있어도 뭔가 밀려오고 있다는 느낌 그때 보이는 저 연꽃
더는 자극할 것도 없는 빌딩들 사이로 작은 연꽃들 가만히 눈에 들어오고 응시할수록 더 아리게 파고드는 꽃 별 게 아닐수록 잔인하게 파고드는…… 파고들어 더 먼, 작은 연꽃으로 보이는가
아무렇지도 않아서 밀려오는 이 슬픔 바람 저편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을 거다
작게 핀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저녁 생각할수록 무더위가 몰려오고 연잎, 그 무더운 초록이 내 눈에 피어올랐다
이길상 시인 / 파필리온 컬렉션*
내 서가에는 책들과 클래식 시디 몇 장 꽂혀 있다 나비는 시디 재킷에 박혀 있고 오늘은 베토벤의 ‘합창’
나비에 명암이 적절하게 드리워진다 드리워지지 않은 듯 드리워진 명암 내 눈은 세상의 수많은 얼굴들로 가득 차 보인다 모든 걸 보고 싶기도 보기 싫기도 했으므로 명암은 항상 깔리고 있다 하여 당연한 듯 내 손에 그 음반은 들려 있고 이 순간은 시간이 아니라 동굴이다 모든 세기가 통과한다 통과하고도 통과한다
햇살을 받은 재킷이 화사하다 그어진 빛줄기는 이때까지의 나를 잘 알고 있으리라 살 수 있는 것들만 역사가 되고
나비 날개의 색은 그걸로 충분했다 잡힐 듯 더 멀어지는 얼굴들만 가득 찬다
*파필리온 컬렉션: 클래식 명곡이 담긴 음반. 그 재킷엔 나비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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