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기 시인 / 순대를 먹으며
끓는 찜통 위 똬리를 튼 순대가 변의를 느끼는지 허리까지 탱탱해지며 연신 가쁜 숨을 내몰아쉰다
어머니, 순대를 껌처럼 오래도록 씹고 계신다 쉴새 없이 여닫는 입술이 괄약근 같다
똥은 항문이 떨구는 노랗게 익은 열매다 열매도 달리지 않는 가엾은 노구의 식탐이여
죽은 돼지가 남긴 염통이 몇 점 낮달 같은 접시에 담겨 두근거린다
죽음이 껌을 팔러 다녔다
박후기 시인 / 겨울 옥탑방
일요일 아침 지붕 위의 방 한 칸 문을 열면 빈산 가지에 얼굴이 찢긴 수척한 하늘이 밀려들어오고 고추장 단지 위 소복이 쌓인 눈처럼 눈이 부어 오른 아내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은 채 세탁기를 돌린다 느릿느릿 텔레비전 속에서 기어 나온 나는 주인집 대문을 두드리는 중국집 오토바이 소리에도 허기를 느낀다 오래 전 잎이 말라버린 화초는 썩은 이처럼 겨우내 뿌리가 욱신거리고 아픔을 참는 화분의 얼굴에 주름처럼 몇 줄 금이 간다 두꺼운 얼음장 같은 방바닥에 귀를 대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한 콘크리트 속 보일러 관을 구불구불 돌아 흐르는 물 봄은 오고 있는 것일까 빨랫줄에 이불이 내어 걸리고 이불에 핀 모란의 볼이 발갛게 얼어붙는다 겨울 한 자락이 집게에 매달려 얼어붙은 생각을 펼쳐 보인다 언 이불에 이마를 대 본다 차갑다 난간에 기대어 산 아래 잠든 개처럼 둥그렇게 웅크린 집들을 쳐다본다 기우뚱, 내려앉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집들은 힘겹게 비탈을 기어오른다
박후기 시인 / 내 가슴의 무늬
비가 그치자 나무들은 있는 힘껏 잎을 부풀렸다 성긴 나무의 뿌리는 부활절 사제의 분주한 발길처럼 햇빛의 설교를 땅 속에 퍼뜨렸으며 바람 앞에서 잎들은 성호를 그었다 죽은 잎은 쉽게 떨켜를 놓아버렸지만 죽은 형의 애인은 끝까지 죽은 형의 관짝에 매달렸다 땅바닥에 뒹굴었다
스무 살 여린 내 눈물이 군용 소보루빵의 푸른곰팡이로 피어났고 숨죽인 초소 뒤편 발목까지 바지를 풀러 내린 풀들의 수음이 은밀했다 바람에 뒤집혀 반짝이는 은사시나무 잎사귀들, 그토록 수많은 충고를 담아두기에 내 귀는 너무 천박했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저 혼자 튀겨나가는 폐타이어 화단의 봉숭아씨 나도 팍, 터지고 싶었다 그러나 터진 열매 껍질처럼 빈주먹 말아 쥔 채로 이리저리 얻어터지며 원위치 하던 나는 후두둑 후두둑 후박나무 잎사귀 비 맞는 소리 눈물겹던 그 여름의 나무 밑을 잊지 못했다
십일월은 쌀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쓸쓸하게 널브러진 갈색의 잎들 오그라들고 한때 부풀었던 그 많은 시간들 더는 뒤돌아볼 수 없음이여
나무들 딱딱한 가슴 속 섬세한 울림으로 새겨지는 둥그런 생의 기록 아, 무엇을 쓸 것인가 얼룩진 무늬들, 덧없는
-작가세계 2003년 여름호-
박후기 시인 / 껍질
개펄은 바다가 되기도 하지만, 꼬막이 자라는 밭이 되기도 한다
콩 싹이 껍질을 벗고 떡잎을 내밀 듯, 꼬막들도 껍질을 벌려 새 혓바닥 같은 싹을 틔운다
껍질만 남은 노인들이 호미처럼 등을 구부려 꼬막을 캐고 있다
가끔 새가 날아와 꼬막을 쪼아 먹기도 하고, 껍데기만 남은 꼬막이 자식들이 속만 파먹고 내버린 가난한 노인들과 함께 쓸쓸한 바닷가를 떠다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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