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호 시인 / 우물
촛불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빈 우물이다 바닥난 슬픔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조금씩 나는 새고 있었던 거다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던 거다 저 높은 심연에서 던지는 두레박 소리 촛불을 끄고 우물을 메우고 어딘가에 고여 있을 바람이다 촛불의 한숨이다
장만호 시인 / 빈 집 한 채
서쪽 벚나무 등걸이에 매미 날아간 자리 빈 매미 한 채 매달려 있다 벼랑 위의 집 같다
반금 몸 벗은 영혼이 제 육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참을 울고 갔을 오후 같은 집
버려진 터미널에 앉아 영원을 기다리는 노인의 저녁 같은 집
늙은 자궁 같은 집 울어서
너무 울어서 텅 빈 집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옛 여자의 눈동자 같은
이젠 허공이 살고 있는 빈 집 한 체
장만호 시인 / 무서운 속도
다큐멘터리 속에서 흰수염고래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죽어가는 고래는 2톤이나 되는 혀와 자동차만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나래이터는 말한다 자동차만한 심장,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도 있는 심장. 나는 잠시 쓸쓸해진다. 수심 4,812미터의 심연 속으로 고래가 가라앉으면서 이제 저 차 속으로는 물이 스며들고 엔진은 조금씩 멎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마음은 어느 좌석에 앉아있을 것인가. 서서히 죽어가는 고래가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미끄러지듯이 가닿는 시간과 한 번의 호흡으로도 30분을 견딜 수 있는 한 호흡의 길이 사이에서, 저 한없이 느린 속도는 무서운 속도다. 새벽의 택시가 70여 미터의 빗길을 미끄러져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무서운 속도로 들이받던 그 순간 조수석에서 바라보던 그 깜깜한 심연을, 네 얼굴이 조금씩 일렁이며 멀어져가고 모든 빛이 한 점으로 좁혀져 내가 어둠의 주머니에 갇혀가는 것 같던 그 순간을, 링거의 수액이 한없이 느리게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지금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음아,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니. 고래야, 고래야 너는 언제 바닥에 가닿을 거니.
장만호 시인 / 유령
그는 처음으로 나를 읽어준 눈동자였지 노원역 술집에서 시와 돈을 이야기했네 눈 내리는 수유리의 밤의 높이에 대해서, 그러나 시간강사와 전임강사를 구분할 줄 아는 초등학생 아이들의 명민함에 대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처마의 고드름 같은 이자에 대해서
어느 날 그를 찾는 전화들이 나에게 오네 (전화번호를 바꾸고 메일주소를 바꾸면 그 뿐) 십년을 넘게 만나고도 그의 집을 모르네 아내를 모르고 아이들을 모르고, 통장의 잔고를 모르고
100억년 전의 가장 오래된 은하를 알고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아는데 그의 집과의 거리를 그가 만들었던 세상과의 간격을 모르네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네
그러니, 지금 지는 나뭇잎은 봄에 본 그 나뭇잎인가, 지금 보는 저 거리는 어제의 거리인가, 당신은 어제의 당신인가, 나뭇가지를 차고 나는 작은 새는, 정종을 마실 때 우리의 머리 위에서 흐르던 눈송이들은 지금 어디를 흐르는가 그러니 우리는 유령이 아닌가.
생활의 유령 시의 유령 세상 모든 타자의 유령
장만호 시인 / 먼지와 모래의 날들
오래된 책을 펼치자 모래가 흘러내린다 아직 외출로부터 돌아오지 않은 사서와 몇 줄의 주석을 찾아 서가를 순례하는 사람들의 저녁
책은 항상 기도의 형식으로 서 있고 손바닥을 열어 보면 손금 같은 문장들 어디론가 흘러, 가고 있다
책장을 넘기며 한때, 나는 내가 아닌 것이 얼마나 되고 싶었던가 <연기수업>을 읽던 밤의 책상에 적어 놓던 말들과 '당신'이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몇 마디의 조용한 소란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오래 앓던 날들,
기억하지 않았으면 먼지의 문체를 살았으면 모래의 문장을 살았으면,
주어를 버리고 떠도는 술어들과 감정들처럼 가벼웠으면 목적어 없이 사랑했으면 좀 더 하찮아졌으면
그렇게 먼지와 모래의 날들을 살았는데
오늘, 책갈피에서 떨어지는 20년 전 대출기록표의 내 이름; … …… 주르륵, 시간의 문장들이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내가 아닌 어딘가에서, 누군가 조용히 저를 글썽거리는 소리 잠자코 흩어진, 모래를 쓸어 담는 소리
참으로, 중요한 것은, 메마름을 견디는 일이다* 메마름을 견디는, 일이다… 중얼거리며 누군가가 빌려 간 나를 찾아서 빈 자리에 꽂힌 어둠을 꺼내 읽고 또 읽는 황사의 저녁
*'참으로 중요한 것은 메마름을 견디는 일이다' 원효, 大乘起信論疏
장만호 시인 / 벚나무 아래서
1. 물들의 우화
물들은 일어나 한 그루 나무가 된다 어두운 흙 속에서 이내 출렁이다가 제 몸을 이끌어 거슬러 올라갈 때 물들은 여기 나무의 굽은 등걸에서 잠시 동안은 머물렀을 것이다 제 몸을 수 없는 갈래로 나누고 나누어 나무의 등뼈와 푸른 핏줄을 통과할 만큼 작아졌을 때 공기의 계단을 오를 만큼 가벼워졌을 때 목질의 그릇에 담겨 잠을 자다가 물들은 술처럼 익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봉인된 시간을 열고 꽃들은 핀다 제 몸을 바꾼 물들은 나무의 눈망울이 되어 지상과 제 높이의 꿈을 견주어 보며 몽롱하게, 다만 몽롱하게 제 향기에 도취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저 나무는 이처럼 백색의 광휘로 불타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2. 풍화
여기 커다란 불기둥이 있네 몹시도 타오르다가 바람의 가는 뼈를 헤집고, 거기 제 몸을 날리는 차가운 불꽃들이 있네 때를 기다리는, 한때 무섭게 가라앉은 물이었다가 제 꿈으로 불타오르는 뜨거운 몸이었다가 이제는 너에게 가고자 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직의 물결, 그 수직의 물결을 따라 만천화우로 너에게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곱게도 사람아, 네 얼굴이 향기처럼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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