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시인 / 타이어의 못을 뽑고
사랑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준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때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 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복효근,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2013, 56~57쪽
복효근 시인 / 춘향의 노래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 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
복효근 시인 / 오리가 오리여야 하는 이유
엄마, 우리 안에서 놀아도 먹을 것 주잖아요 추운데 꼭 물에 들어가야 돼요?
물에서 헤엄치지 않으면 우릴 돼지로 안단다
그러면 좀 어때요?
그러면 우리가 꿀꿀하고 울어야 하는데 그럴 자신 있니?
복효근 시인 / 책에 나와 있지 않은 것
곤줄박이를 알기 위해 조류도감을 펼쳤을 때 때마침 곤줄박이 한 마리가 책 위에 앉았다
진짜는 책 밖에 있다고
복효근 시인 /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
허수아비 같다는 말처럼이나 나를 두고 사람 같다는 말도 하지 않았으면 해
이래봬도 난 진짜야 진짜 허수아비
복효근 시인 / 세상의 모든 새끼
고향집 처마 밑에 제비둥지 먹이 달라 보채는 새끼제비 몇 마리 그 노란 부리를 떠올리면 내가 누군가의 새끼였으며 또 내 새끼들의 어버이라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복효근 시인 / 60촉 별
손주들이 다녀가는 주말 저녁에만 60촉 외등을 밝히셨다 평소엔 켜지 않다가 차가 동구 밖을 벗어날 때까지 환하게 빛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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