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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복효근 시인 / 타이어의 못을 뽑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복효근 시인 / 타이어의 못을 뽑고

 

 

사랑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준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때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 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복효근,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2013, 56~57쪽

 

 


 

 

복효근 시인 / 춘향의 노래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천 년을 지리산이듯

도련님은 그렇게 하늘 높은 지리산입니다

 

섬진강은

또 천 년을 가도 섬진강이듯

나는 땅 낮은 섬진강입니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지리산이 제 살 속에 낸 길에

섬진강을 안고 흐르듯

나는 도련님 속에 흐르는 강입니다

 

섬진강이 깊어진 제 가슴에

지리산을 담아 거울처럼 비춰주듯

도련님은 내 안에 서있는 산입니다

 

땅이 땅이면서 하늘인 곳

하늘이 하늘이면서 땅인 자리에

엮어가는 꿈

그것이 사랑이라면

 

땅 낮은 섬진강 도련님과

하늘 높은 지리산 내가 엮는 꿈

우리 사랑은 단 하루도 천 년입니다.

 

 


 

 

복효근 시인 / 오리가 오리여야 하는 이유

 

 

엄마, 우리 안에서 놀아도 먹을 것 주잖아요

추운데 꼭 물에 들어가야 돼요?

 

물에서 헤엄치지 않으면 우릴 돼지로 안단다

 

그러면 좀 어때요?

 

그러면 우리가 꿀꿀하고 울어야 하는데 그럴 자신 있니?

 

 


 

 

복효근 시인 / 책에 나와 있지 않은 것

 

 

곤줄박이를 알기 위해

조류도감을 펼쳤을 때

때마침 곤줄박이 한 마리가 책 위에 앉았다

 

진짜는 책 밖에 있다고

 

 


 

 

복효근 시인 /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

 

 

허수아비 같다는 말처럼이나

나를 두고 사람 같다는 말도 하지 않았으면 해

 

이래봬도 난 진짜야

진짜 허수아비

 

 


 

 

복효근 시인 / 세상의 모든 새끼

 

 

고향집 처마 밑에 제비둥지

먹이 달라 보채는 새끼제비 몇 마리

그 노란 부리를 떠올리면

내가 누군가의 새끼였으며

또 내 새끼들의 어버이라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복효근 시인 / 60촉 별

 

 

손주들이 다녀가는 주말 저녁에만 60촉 외등을 밝히셨다

평소엔 켜지 않다가

차가 동구 밖을 벗어날 때까지 환하게 빛나던

 

 


 

복효근(卜孝根) 시인

1962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1년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등이 있음.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 2015. 제2회 신석정문학상. 대강중학교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