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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문규 시인 / 장작 패는 남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양문규 시인 / 장작 패는 남자

 

 

장작을 패며 겨울 난다

저 잘린 굵고 흰 장딴지 나무토막

허리 꺾인 사십 중반의 생인지도 모를

나무 빠갠다

허연 살 드러나도록 잘게 부순다

도끼날에

어둑어둑

찢겨 날아간 생

장작 패며 겨울을 난다

빠개진 장작 갈피 기웃기웃 들여보면서

 

 


 

 

양문규 시인 / 찔레꽃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아니, 죽어 살과 뼈가 녹아

꽃이 될 때까지

천태산 은행나무

언덕에 기대어

살았으면 좋겠다, 골백번

같은 말을 되새겼다

누추한 삶이지만

외롭지 않을 만큼 살다가

슬픔이 마를 때 떠나리라

절, 하진 않았지만

절이 보이는 산모롱이 홀로 앉아

가만 절할 때 많았다

 

 


 

 

양문규 시인 / 겨울나무

 

 

허공에 기대어 천 년

한겨울 눈 속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영국동 은행나무

 

 


 

 

양문규 시인 / 배밭에서

 

 

배의 향기는 아버지의 땀 냄새다

무엇을 뜨겁게 쏟아부었는지

입술로부터 아주 작은 희망이 부풀려진다

산등성이 비알진 밭뙈기

배나무 속으로 흐르던

짐승의 뜨거운 눈시울

가지마다 시절에 찌든 잎 비끄러매고 있다

일흔 가까운

빈 수레 같은 생이

누런 봉지 안에서

그믐달보다 더 시린

달빛을 꺼내고 있다

 

 


 

 

양문규 시인 / 꽃들에 대하여

 

 

올해 처음으로 피어난 꽃들에 대하여

아름답다 말하지 말자

 

봄날로부터 가을에 해거름까지

우리들이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의 어디에서나 피어있을

그 꽃들을 함부로 얘기하지 말자

 

그리움과 사랑 같은

혹은 순수나 빛깔 따위

마음을 치장하는 너울이 아님을

가지마다 흐트러지는 잎의 하나하나에

말 못할 아픔 베올로 짜여 있음을

우리 얘기하지 말자

 

묏등 가에 서 있는 들꽃 한 송이

멀리서 그저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아니, 이 땅의 주름진 하늘 끝에 닿아

되돌려지는 메아리로

누구나 꽃밭에서 생각하던

통곡하다 떠나간 거리의 한 모퉁이

들꽃에 대하여도

우리 말하지 말자

 

결코 아름답다 얘기하지 말자

 

 


 

 

양문규 시인 /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오늘 밤에도 또 헐벗은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면서 겨울나무 밑둥엔 살기가 감돌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처럼 부질없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이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내 하는 작업이 더없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가혹하게 겨울나무 밑둥에 물 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또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무언가 소리 없는 비정한 분노의 싹이 곧 움틀 것이라고

 

 


 

 

양문규 시인 / 그늘 속에는

 

 

하늘 받든 은행나무는 안녕하신지?

햇살 푸지도록 환한 날

다시 천태산 영국사로 든다

은행나무는 낮고 낮은

골짜기를 타고 천 년 동안 법음 중이다

해고노동자, 날푼팔이, 농사꾼

시간강사, 시인, 환경미화원

노래방도우미, 백수, 백수들......

도심 변두리에 켜켜이 쌓여 있는

어둠이란 어둠,

울음과 울음의 바닷속을 떠돌던

사람이란 사람 모다 모였다

가진 것 없어 정정하고

비울 것 없어 고요한

저 은행나무 그늘이 되고 싶은 게지

하늘을 닮아가는 아버지도

밭둑가 구름이 드리운 그늘에

잠시, 고단한 몸 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그늘 속에서 쉬는,

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영국사 은행나무 아직도 법음 중이다

 

 


 

양문규 시인

1960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 청주대학 국문과 졸업.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학위 취득. 1989년 《한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이 있음. 현재 계간 『시에』 편집주간,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대표. 대전대, 명지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