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규 시인 / 장작 패는 남자
장작을 패며 겨울 난다 저 잘린 굵고 흰 장딴지 나무토막 허리 꺾인 사십 중반의 생인지도 모를 나무 빠갠다 허연 살 드러나도록 잘게 부순다 도끼날에 어둑어둑 찢겨 날아간 생 장작 패며 겨울을 난다 빠개진 장작 갈피 기웃기웃 들여보면서
양문규 시인 / 찔레꽃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아니, 죽어 살과 뼈가 녹아 꽃이 될 때까지 천태산 은행나무 언덕에 기대어 살았으면 좋겠다, 골백번 같은 말을 되새겼다 누추한 삶이지만 외롭지 않을 만큼 살다가 슬픔이 마를 때 떠나리라 절, 하진 않았지만 절이 보이는 산모롱이 홀로 앉아 가만 절할 때 많았다
양문규 시인 / 겨울나무
허공에 기대어 천 년 한겨울 눈 속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영국동 은행나무
양문규 시인 / 배밭에서
배의 향기는 아버지의 땀 냄새다 무엇을 뜨겁게 쏟아부었는지 입술로부터 아주 작은 희망이 부풀려진다 산등성이 비알진 밭뙈기 배나무 속으로 흐르던 짐승의 뜨거운 눈시울 가지마다 시절에 찌든 잎 비끄러매고 있다 일흔 가까운 빈 수레 같은 생이 누런 봉지 안에서 그믐달보다 더 시린 달빛을 꺼내고 있다
양문규 시인 / 꽃들에 대하여
올해 처음으로 피어난 꽃들에 대하여 아름답다 말하지 말자
봄날로부터 가을에 해거름까지 우리들이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의 어디에서나 피어있을 그 꽃들을 함부로 얘기하지 말자
그리움과 사랑 같은 혹은 순수나 빛깔 따위 마음을 치장하는 너울이 아님을 가지마다 흐트러지는 잎의 하나하나에 말 못할 아픔 베올로 짜여 있음을 우리 얘기하지 말자
묏등 가에 서 있는 들꽃 한 송이 멀리서 그저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아니, 이 땅의 주름진 하늘 끝에 닿아 되돌려지는 메아리로 누구나 꽃밭에서 생각하던 통곡하다 떠나간 거리의 한 모퉁이 들꽃에 대하여도 우리 말하지 말자
결코 아름답다 얘기하지 말자
양문규 시인 /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오늘 밤에도 또 헐벗은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면서 겨울나무 밑둥엔 살기가 감돌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처럼 부질없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이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내 하는 작업이 더없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가혹하게 겨울나무 밑둥에 물 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또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무언가 소리 없는 비정한 분노의 싹이 곧 움틀 것이라고
양문규 시인 / 그늘 속에는
하늘 받든 은행나무는 안녕하신지? 햇살 푸지도록 환한 날 다시 천태산 영국사로 든다 은행나무는 낮고 낮은 골짜기를 타고 천 년 동안 법음 중이다 해고노동자, 날푼팔이, 농사꾼 시간강사, 시인, 환경미화원 노래방도우미, 백수, 백수들...... 도심 변두리에 켜켜이 쌓여 있는 어둠이란 어둠, 울음과 울음의 바닷속을 떠돌던 사람이란 사람 모다 모였다 가진 것 없어 정정하고 비울 것 없어 고요한 저 은행나무 그늘이 되고 싶은 게지 하늘을 닮아가는 아버지도 밭둑가 구름이 드리운 그늘에 잠시, 고단한 몸 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그늘 속에서 쉬는, 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영국사 은행나무 아직도 법음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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