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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만호 시인 / 겨울 풍경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장만호 시인 / 겨울 풍경

 

 

술을 먹고 집으로 가는 길

숨죽인 화계사를 건너고 국립 재활원을 지나다 보면

서서히 일어나 하나, 둘 셋 ······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긋듯 손을 잡는 아이들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 부자유한 별들

밀거나 당겨주며 수유리의 밤을 온 몸의 운동으로

순례한다, 길 밖에 고인 어둠만을 골라 딛으면서

몸이 곧 상처가 되는 삶들을 감행하며

흔들리는 平生을, 과장도 엄살도 없이 흔들며 간다

그 모습 가축들처럼 쓸쓸해

왜 연약한 짐승들만 겨울잠을 자지 않는지

작은곰자리에서 내려올 눈발을 헤치며,

왜 사람만이 겨울에 크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붕어빵을 입에 물고는

風警처럼 흔들리며 간다

깨어 있으려고

흔들려 깨어 있으려고

 

 


 

 

장만호 시인 / 이파리 위의 생

 

 

나무들은 대지의 푸르른 심지

한번도 이 촛불은 꺼지지 않았네

바람이 불면 더욱 더 일렁거릴 뿐

마을은 전생의 언덕에 머리를 괴고

가만히 최면에 들지

 

그런 밤이면,

간혹 궁수지리를 이탈한 별 하나

화살표를 남기고 사라지거나

새 한 마리

(후생에는 잘 할 수 있겠지)

푸드득거리며 날아 오르기도 하지만

산다는 것은 명백한 모호함

나는 이생을 생각하다가

조용히 심장을 두근거리며

푸른 촛불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네

 

그러나, 그 불길 속

잘못 내려앉은 인생인 듯

명명백백한 벌레 한 마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가듯

한 불꽃에서 다른 불꽃으로 건너가고 있네

생애가 그저 한 이파리였을 뿐이네

 

 


 

 

장만호 시인 / 바람소리를 듣다

 

 

 아버지는 늙어갈수록 더 깊은 강으로 나갔다 늙은 아버지의 삿대가 비단을 자르듯 저녁의 저 강, 저 저녁의 강으로 나아갈 때 아버지, 자라 한 마리만 잡아다 주세요 푸른 자라를 키우고 싶어요 그물을 펼치는 거미를 보면서 나는 자꾸 무언가를 키우고 싶었다 할머니의 밭은기침 소리를 들으며 늙은 아버지는 더 먼 강심으로 배를 저어갔지만 아버지의 그물에 걸릴 고기는 없었다 할머니, 기침소리가 너무 커요 아가, 속이 비어 있는 것들은 이렇게 소리를 낸단다

 

 바람이 가는 길을 마음이 가네 저녁 한때의 바람을 가르는 대숲에서 아버지, 늙은 아버지가 살고 아버지 허물을 벗는 봄산의 기슭 아래서 뼈를 깎듯 갈라진 발굽을 벗겨내는 할머니와 오래 거기 살았네 할머니 자라는 어디를 갔을까요 배 고프지 아가, 소쩍새 소리를 들어라 그러나 새소리들은 낮고 어두운 집으로 들어와 마당을 떠다닐 뿐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네 푸른 소리들이 머무는 그곳에 늙은 아버지, 거기서 우리 갑골문처럼 오래 살았네

 

 


 

 

장만호 시인 / 적벽가

 

 

 사랑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불 같은 상처를 얻은 적이 있었는데 가령 한 말의 술을 마시고 한나절의 비를 맞고도 자벌레처럼 움츠리던 적이 있었는데 비 맞은 매미처럼 떨었는데 그런 날이면 나 적벽에 가고 싶었네 나 그저 생전에 하나의 태몽 어느 여름날 어머니의 꿈속을 유영하던 어린 물고기였을 뿐인데 그 윤회의 강에서도 나는 이 사랑을 꿈꾸었던가

 큰물 지면 큰물이 흐르고, 물은 더욱 단단한 뼈와 흰 힘줄을 갖고, 그 힘으로 나를 덮치고, 사랑은 물처럼 흐르고, 젖은 깃털처럼 나를 가라앉히고, 나무들은 강둑으로 얼굴을 내밀고, 네 설움 가소롭다, 어디서 어머니의 목소리 들리고, 적벽은 보이지 않고, 나는 더 이상 물고기가 아니고 ······

 사랑을 하고서도 우화하지 못하네 그대의 龍文 아래 상처는 비늘처럼 빛나고 나 화석처럼 단단해져만 가네 어느 새로운 날들은 오지 않고 그곳에 가서 차라리 풍화되고 싶었지만 나는 한 번도 물을 건너지 않았네 물 건너지 않았으므로 가지 못한 적벽에 그대가 풍화하고 있네

 

 


 

 

장만호 시인 / 원정(園丁)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1)

하늘은 어디에 이 많은 음들을 숨겨두고 있었던 걸까

부딪히자마자 세상을 온통 악기로 만드는

환한 빗방울들, 이런 날이면

새들도 타악기다

흙들은 더욱 겸손해져서

길 잃어 젖은 개미에게도 발자국을 허락한다

덜 자란 풀꽃들을 솎아내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무엇을 가꾼다는 것은 잘라내거나 뽑아내는 일이라는 걸

이 정원에서 배우기도 했지만,

모르겠다 꽃들에게도 말은 있어

그 꽃말들을 듣다 보면

작은 것들일수록 제 뿌리를 다해 흔들리거나

은화식물처럼 열망의 보따리를 감춰두고 있다는 것을

이 정원의 저녁

작고 덜 자란 것들이 나를 가르친다

아이들은 잘 살고 있을까,

영희, 영호, 영수......

내가 이름 붙인 부끄러운 꽃말들

볼품 없는 한 생이 떨군,

젖은 꽃잎들

 

아침의 꽃들을 저녁에 주워 올릴 때

깊은, 나무들이 울리는 푸른 풍금의 소리

 

1)노신, 朝花夕拾

 

 


 

장만호 시인

1970년 전북 무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과와 同 대학원을 졸업.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水踰里에서>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무서운 속도』(랜덤하우스, 2008)가 있음. 김달진 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경상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