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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하늘 시인 / 데칼코마니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김하늘 시인 / 데칼코마니

 

 

네가 낯설지 않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아

내게서 너를 본떴거나

네게서 나를 훔쳐 왔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닮아 있어서,

너무 기쁜데,

이국적인 기분이 드는데,

너를 또는 나를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 게 이렇게

어둡고 숨 막히는 반짝임이었나, 우리는

골몰해 볼 필요가 있어

 

입술이 겹쳐질 때마다 느껴,

이 관계가 나팔꽃처럼 시시해지지는 않을까

 

빗소리가 뜨겁게 바닥을 달굴 때

물고기의 호흡법으로 간신히 생을 견디는 너와

부피도 없이 밀도만으로 살아남은 나를,

굳이 둘로 쪼개지 않아도 됨을 깨닫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너를 내 풍경에 구겨 넣고,

나날이 낯빛이 흐려가는 카나리아처럼

우리는 우울한 식사를 하지

 

"공기가 시들고 있어."

"뭐가?"

"우리가 불가능하다는 신호야."

 

함께일수록 서로를 칭할 말을 모르게 돼, 둘이어서 안되는 것이 불어날수록 깨끗한 환청이 매일 찾아와, 내 마음을 오려 교회에 숨겼지만 복사된 마음이 더욱 멀쩡히 살아 있고, 나부끼는 밤마다 너를 안았지만 차가운 네 빰이 말하고 있어

 

너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나의 끝,

나의 종말.

 

『샴토마토』 , 김하늘, 파란, 2016년, 38~39쪽

 

 


 

 

김하늘 시인 / 루시드 드리머

 

 

포궁胞宮에 따뜻한 물이 고이는 걸 느꼈어

그림자도 가지지 못한 생명이

가난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때

의도한 무수한 미래들은

나에게 슬픈 일이 벌어질 거라는

작은 예감을 던져 주고 갔어

나를 지탱하는 작은 숨,

가위로 잘라내지 못한 삶,

불규칙적으로 추출되는 꿈, 모두

내가 아는 이야긴데

 

자꾸만 증식하는 살덩이가

나를 갉아먹고 있을 때

그것을 몰래 사랑하는 일

어쩌면 가장된 애정으로,

신음을 내면서 내게로 걸어 들어오면,

잠시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슬픔의 언어로 꿈의 삶을 낱낱이 기억하며,

몇 번이나 더 응원해야 하는지

또는

네가 썩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며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어딘가로 배달되는

너를 유실함으로써,

알 수 없는 기원을 느껴

 

잘 아는 얼굴이었다가도

자꾸만 뚱뚱해지는 기억 속에서

너의 기분을 점점 잊어 가는 그 나날들

겁먹은 고양이처럼 네 앞에서 화를 내다가

발가벗은 나의 나체에서

네가 다시 탄생하고 있다는 것,

아무도 모르는 소문이 되어 가고 있을 때

나는 희미한 얼굴들에게서

너의 모습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

이 꿈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아

흔쾌히 신호를 보내지 않는 너를

애써 미워했다가,

난감한 자세로 안아 주기 위해

 

아직 남아 있는 여분의 꿈에서

반드시 너를 데려오기 위해

빈집마다 창을 두드리며 볕을 내어주었지

모르는 밤마다 골고루 곪아 가던 너를,

마음대로 부르지 않겠다던 약속

네가 오래 보이지 않으면

고요히 되새기는 걱정들

모두 내게로 돌아와 박히는 화살

너의 시작은 후회였으나

나의 끝은

열 번도 더 꾼 꿈이었구나

 

꿈이면

상실하는 것이 익숙할 줄 알았지

 

 


 

 

김하늘 시인 / 미물

 

 

손가락 하나를 걸고

우리는 약속했지

작은 먼지처럼 살겠다고,

이름 모를 잎사귀가 되겠다고,

턱이 낮은 우물처럼 가까워지겠다고,

어떤 소용도 없을 무언가가 되어

인간의 기교를 버리겠다고,

아주 유의미한 이 욕구는

그렇게 개역되었다

내 안의 마음이 소실로 가득 찼을 때

온전히 너를 다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을까

 

땀 많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땀의 온도만큼 뜨거웠던 너의 더운 숨

잘 아는 노랫말처럼 당연했던 그 기색,

우리는 이보다 더 허무해져야 해

닳고 닳은 돌처럼,

돌의 구실도 못 하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미래를

미리 사는 느낌이 들어

손에 익은 건반을 악보도 없이 치는

그런 유려한 삶에서,

몇 번인가 우리는 다시 아름답게 빚어지고,

수많은 밤낮을 오래오래 견디며

우리는 웃었어

 

굴러다니는 술병에 남은 진득한 액체처럼

내 삶도 아무 곳에서나 벌어졌지

내가 침묵하는 사이 네가 다가왔고

나의 침묵과 너의 침묵이 만나

눈썹 위로 차곡차곡 쌓이던 어느 날

마음의 열도는 다시 붐해졌어

매 순간 새로 하는 다짐처럼, 또 우리를

아무것도 아니게 하는 첫 마음이

과연 이곳으로 인도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 계절에도 흰 그늘이 있어

우리가 짧게 쉬어갔던 걸까

 

사실 모두와 공존하고 있지만,

작은 틈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에 대해

아무도 골똘해지지 않을 거야

마음에 작은 선인장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그럭저럭 살 만해

메마른 삶에서 더욱 죽지 않는 숨결

단비가 없어도 무섭게 사랑하고

자신의 마음을 독려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삶

고둥처럼 속을 까발리면

더욱 별 볼일 없는,

매일 처음 사는 느낌으로

우리는 하나의 장면에 갇힌다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김하늘 시인 / 블랙커프스홀

―Pour Malena

 

망가져야 해

 

거울에 반사된 내 알몸이 식상해 그럴 때면 애인의 물건을 훔치곤 하지 대리운전 번호가 찍힌 라이터나 면도기 또는 자위를 하고 난 뒤의 휴지 뭉치 그게 아니어도 좋아 잘 입지 않는 드로즈 팬티나 페라리 블랙 냄새가 미미하게 묻어나는 커프스 한 짝 비교적 작고 사소할수록 좋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가벼운 것들

 

훔쳐 온 가위는 유용했지 내 흑발 머리를 들쭉날쭉하게 만들었어 생머리 여자들은 주로 간교하거나 신경질적이지 올곧은 몸을 돌보거나 지키지 난 그런 여자들에게서 매너리즘을 느껴

 

지겨워지겨워지겨워(데이트가) 지겨워지겨워지겨워(브래지어가) 지겨워지겨워지겨워(흔들리는 젖가슴이) 지겨워지겨워지겨워(지겨워)

 

더 망가져야 해 훔쳐 온 식칼에 내 이름을 쓰고 싶어, 기억이 안 나, 사람들이 나를 말레나라고 불러, 내 이름을 나는 영영 몰라, 섹스는 질려, 자궁으로 식칼을 밀어 넣는 편이 낫지, 거기엔 환멸이 없어, 뻔하지 않은 상처와 흉터는 아름다워

 

오늘 밤,

난 드로즈 팬티를 입고 장미 덩굴을 밟아

살갗을 터트리는 그 수많은 가시들,

발바닥에 엉기는 피가 속살거리며 되묻곤 해

넌 아직도 죽지 못했니?

병신,

오, Merde!

 

나날이거부하는것들이많아졌고그거부에내가있고네가있어(도대체얼마나더저질이어야하는거지?)거울은깨졌고사실난점점사라지는연습중이야죽을날짜를고민하는여자는까다롭지도않아깨진거울의파편에침이나뱉자개같아똥이나빨아!(항문이주는구원도퍽낭만적이지않아?)

 

내일은 또 어떤 방식으로 사랑스러워져 볼까

 

 


 

 

김하늘 시인 / 붉은 그림자들

 

 

더 천해지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몰라, 입안에서 제 이름을 지우는 느린 자살의 언어, 살아 있는 일보다 사라지는 일이 더 쉬워서 손등으로 웃고, 낯선 여자와 몸을 섞으며 내 자궁 속으로 지는 노을을 봤어, 그림자가 오래오래 썩은 잇몸처럼 부식해 갈 때, 무덤 속에서 평온해진 나를 봐

 

누군가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어야 했어, 일부러 슬펐고 일부러 공허하고 일부러 웃을 거야, 내 안을 견디고 간 여자들은 미쳐 버렸고, 내 겉을 훔쳐보던 남자들은 식물처럼 죽어 버렸지, 이번 생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이상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맥박만을 믿고 있었어

 

손목 끝으로 길어지는 흉, 계약되지 못해 죽어 간 저녁의 아기들, 늙은 파충류처럼 늘어지는 육체, 무의미로 자욱해지는 무릎들, 그리고 한 벌의 생을 불경하게 소일하는 내 안의 붉은 여자들

 

얼음 같은 날들에 갇혀 수면제를 먹었지, 자상하게 안아 주던 이도 있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나눈 섹스는 물의 공포가 되어 흘러내렸어, 한 달 치의 수면제와 헤네시 한 병이라면 어디로든 갈 수 있겠지, 욕조 안에 두고 온 춥고 지루한 검은 멍들 이제 청색 테이프로 바르고 있어

 

 


 

 

김하늘 시인 / 나비, 숨

 

 

애인에게선 나비 냄새가 났다

 

날개뼈를 긁어 주면 애인은 애벌레처럼 왼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온다. 나는 침묵했고 애인은 나비가 되고 싶다는 말을 주문 걸듯 반복했다. 나비처럼 말하고 나비처럼 울고 나비처럼 속상해하며 눈에 띄게 말라 갔다. 며칠씩이나 누에잠을 자고 의식이 있을 때도 최소한의 물만 마시고 이따금 냉소 띤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깨물어 달라고 했다.

 

나비의 피가 흐를 것 같아

 

필사적으로 나비가 되고 있는 애인의 몸부림에 대해 기록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 하루조차 우리는 연대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의 두 번째 문장처럼 우리는 겨우겨우 서로를 정다워했을 뿐. 애인은 이제 나비처럼 나비 숨을 쉬는데 (나만 다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프도록) 그것이 흉기가 되어 나를 조롱하고 아예 나비가 되어 가는데 (나비가 된 애인을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일) 내가 구사할 줄 아는 모든 말을 잃어버린 나는 괴로워하는 법도 모르는데 (나의 혀는 점점 굳어 가는데) 차라리 당신이,

 

한 계절도 채 다 살지 못하기를

파괴되기를

 

 


 

김하늘 시인

1985년 대구에서 출생. 2012년 하반기《시와 반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