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일 시인 / 불량 과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속 깊이 여름내 열매는 방 하나씩 들이고 산다
고백할까, 망설이며, 설익어간다
풀밭에 떨어져 쉽게 뒹구는 것들 때문에 한 생애가 온통 철없는 사랑인 줄 안다
언제부터 내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이렇게 신맛도 나고 단맛도 나게 된 것일까
익기 전에 떨어져 멍이 든 불량한 과일들, 대체 감추어 둔 쓸쓸한 상처 한 줌은, 또 뭐람!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 누가 그래, 누가 그래, 속절없이 끝난다고?
하재일 시인 / 숲 속의 성자
거리마다 연등이 높이 켜지고 연둣빛 바람 잔잔한 물결로 일렁이면 마음 가까운 숲으로 가자
오늘은 투명한 날, 햇살들 가볍게 웃어대지만 흐린 날을 생각하여 탁주 한 병 사들고 언젠가 바삭바삭 부서질 몸, 과자도 몇 봉다리 갖고 가 안주하면서 소쩍당 소쩍당 두견이 울음이라도 듣노라면 암 선정이 따로 있나 명상이 따로 있나 내면의 여행은 길기만 하다
살며시 바람아 다가와라 노랑나비야 오월의 어린 잎 새순에 앉아 견고한 일상을 잊어버리고 허공에 떠가는 흰 구름의 느린 보행을 바라보자 바위 틈 약수가 콸콸 나오니 배가 마르지 않고 생각 또한 기름지구나
건기와 우기가 자주 엇갈리는 우리들 생애 한번쯤 언뜻 청명한 날 찾아 고요한 숲 속에 이르면 시드러운 몸 다시 생기가 돌고 끊임없이 타고 오르는 수액이 부풀어올라 나는 나무가 되고 나무는 다시 내가 되어 숲은 한줄기 바람으로 넉넉한 새울타리가 된다
그 서늘한 그늘에서 나는 성자가 된다 숲 속에선 무엇이나 성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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