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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재일 시인 / 불량 과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하재일 시인 / 불량 과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속 깊이

여름내 열매는 방 하나씩 들이고 산다

 

고백할까, 망설이며, 설익어간다

 

풀밭에 떨어져 쉽게 뒹구는 것들 때문에

한 생애가 온통 철없는 사랑인 줄 안다

 

언제부터 내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이렇게 신맛도 나고 단맛도 나게 된 것일까

 

익기 전에 떨어져 멍이 든 불량한 과일들,

대체 감추어 둔 쓸쓸한 상처 한 줌은, 또 뭐람!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

누가 그래, 누가 그래, 속절없이 끝난다고?

 

 


 

 

하재일 시인 / 숲 속의 성자

 

 

거리마다 연등이 높이 켜지고

연둣빛 바람 잔잔한 물결로 일렁이면

마음 가까운 숲으로 가자

 

오늘은 투명한 날, 햇살들 가볍게 웃어대지만

흐린 날을 생각하여 탁주 한 병 사들고

언젠가 바삭바삭 부서질 몸, 과자도 몇 봉다리

갖고 가 안주하면서

소쩍당 소쩍당 두견이 울음이라도 듣노라면

암 선정이 따로 있나

명상이 따로 있나

내면의 여행은 길기만 하다

 

살며시 바람아 다가와라

노랑나비야 오월의 어린 잎 새순에 앉아

견고한 일상을 잊어버리고 허공에 떠가는

흰 구름의 느린 보행을 바라보자

바위 틈 약수가 콸콸 나오니

배가 마르지 않고 생각 또한 기름지구나

 

건기와 우기가 자주 엇갈리는 우리들 생애

한번쯤 언뜻 청명한 날 찾아

고요한 숲 속에 이르면

시드러운 몸 다시 생기가 돌고

끊임없이 타고 오르는 수액이 부풀어올라

나는 나무가 되고 나무는 다시 내가 되어

숲은 한줄기 바람으로 넉넉한 새울타리가 된다

 

그 서늘한 그늘에서 나는 성자가 된다

숲 속에선 무엇이나 성자가 된다.

 

 


 

하재일 시인

1961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하여 안면도서 성장.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 1984년 월간《불교사상》 만해시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아름다운 그늘』,『선운사 골짜기 박봉진 처사네 농막에 머물면서』,『달팽이가 기어간 자리는 왜 은빛으로 빛날까』 『타타르의 칼』『코딩』『동네 한 바퀴』『달마의 눈꺼풀』등과 공저 청소년시집 『처음엔 삐딱하게』 등을 펴냄. 현재 백신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