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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화진 시인 / 물김치 사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정화진 시인 / 물김치 사발

 

 

저녁상에 찰랑이며 놓인

물김치 사발

동동 뜨는 돌나물 한 술을 떠 먹으며

내가 들여다본 사발 속에

문득 연두빛이 풀어지고

우산리의 감나무 한 그루가 자라오른다

 

물김치 사발 속,

돌나물 이파리 사이로 깊어 보이는

감나무 윗가지에 산새 두 마리가

물소리를 내며 날아와 앉고

뭉클뭉클 산 능선이 감나무 위쪽으로

부풀어 오른다

 

감나무 속을 휘저으며

내가 떨어뜨린 밥숟갈을 적시는

부러진 잔가지들

산새는 푸득이며 날아가고

감나무가 사라진 저녁상 위에

우산리의 하늘만 아득히 흘러내린다

 

 


 

 

정화진 시인 / 박우물

 

 

둥글게 내 볼을 파갔어, 박바가지였어

그래도 있잖아, 새색시였어

이쁘게 들여다보는 새벽이었어

떨려 온몸이 파들거렸지 뭐

 

하늘이 몇 번 우그러지고 펴지고 그랬어

 

 


 

 

정화진 시인 / 또 길을 잃다

-이연주 생각

 

 

 늪의 문장과 들짐승 문장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을 정처 없이 걷다 그 길 끝에서 아직도 누군가가 핏빛으로 상처투성이로 나를 기다린다?

 

 생의 마지막 문장으로 된 시집을 그녀가 내게 보냈었다 죄의식이 하얗게 뿌리내리는 날들이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을 잊지 못한다 침묵과 함께 백발이 된 시 구절들이 휘날린다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낯선 길, 그 가장자리로 계속 이동 중이다 아마 그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소파 속 그러나 그 길을 그녀는 마냥 걷고 있다 멀고 먼 눈보라 폭풍 속을, 그녀가 그곳에서 기다린다 크고 서늘한 입맞춤으로 눈(目)의 여왕인 그녀가 나를 한없이 기. 다. 린. 다. 어떤 간곡함 또는 아릿다움의 이름으로

 

 


 

 

정화진 시인 / 칼이 확대된다

 

 

새벽 3시 10분,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물을 찾다가 본다

 

고요하다, 어둠 속엔 석류알 같은 소리들이 박혀 있다

목이 마르다 나는 부엌 유리창에 스며드는 초나흘 달이 싱크대 위에

엎어 놓은 유리컵에 꽂힌 채 푸른빛을 띠고 정지되어 있는 것을 본다

 

순간, 칼이 빛나는 듯하다

칼은 유리컵을 돌아서 구석쪽

싱크대를 내려다보며 도마 위에 다소곳이 얹혀 있다

칼이 확대된다…… 칠월 더위, 마당이 노랗고

토담 아래쪽 닥나무숲 그늘은 짧아 보인다

문지방엔 마른 모가지를 반듯이 기대고 여자아이가 누워 있다

칼이 다가간다, 할머니 손에 쥐어져 있는 시퍼런 날의 칼은

문설주에 쓰윽쓰윽 몸을 문지른다

할머니가 바가지에 담긴 정갈한 물에 칼을 씻는다

칼 씻은 물을 마시던 아이가 이제는 싱크대 뒤켠의 칼을 본다

칼이 확대된다……

말라리아가 파먹은 더위를 칼물로 잠재운다

칼의 작은 입자들이 아이의 가슴에 점점이 박히고 아이는

말라리아를 칼물과 함께 뱉아 버린다

 

다 큰 내가 부엌에서 나온다

목을 축였다고 생각하다가 칼을 떠올린다

칼이 확대된다……아이가 칼을 먹는다

칼이 갑자기 공원묘지를 향해 달아난다 달빛 그리고 들국화가 핀다

칼이 확대된다……

할머니가 아이를 위해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난 후

마당 한가운데 땅을  긁어 십자표를 긋는다 노란 흙이 날린다

맞물린 십자표식 위에 정확하게 칼을 꽂아 바가지를 덮어씌우는 할머니

말라리아의 가슴을 찍어 가르려 한다

 

잠시, 칼이 빛나는 듯하다

나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다 칼을 집어 창 쪽으로 던져 버린다

칼이 부서진다 견고한 유리의 부엌창이 칼을 부순다

나는 또 하나의 칼이 확대되고 있는 것을 본다

칼을 갈고 싶어진다고 나는 느낀다

할머니 무덤가로 칼물을 들고 달려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썩은 볼이 불그레 살아날, 것만, 같다

칼이 확대된다

시계가 3시 15분을 가리킨다 고요하다

서서히, 어둠 속에 박힌 소리들이 한 알씩 빠지기 시작한다

 

 


 

 

정화진 시인 /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장독마다 물이 가득 차 있고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지 뭐예요

아가씨, 이상한 꿈이죠

 

아이들은 창가에서 눈 뜨고

냇물을 끌고 꼬리를 흔들며 마당가 치자나무 아래로

납줄갱이 세 마리가 헤엄쳐 온다

납줄갱이 등지느러미에 결 고운 선이 파르르

떨린다 아이들의 속눈썹이 하늘대며 물 위에 뜨고

아이들이 독을 가르며 냇가로 헤엄쳐 간다

독 속으로 스며드는 납줄갱이

밤 사이 독 속엔 거품이 가득찬다

치자향이 넘친다

 

 


 

정화진 시인

1959년 상주에서 출생. 1986년 《세계의문학》 가을호에 〈칼이 확대된다〉 등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장마는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민음사, 1990)와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민음사, 1994)가 있음. 현재 '오늘의 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