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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우대식 시인 / 수레바퀴 아래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우대식 시인 / 수레바퀴 아래서

 

 

비가 오는 가을

국화 옆에서 내 몸도 시드나 보다

지상에서 사람을 만나

몇은 이별을 하고 몇은 남았다

쇠살로 된 수레바퀴 아래서

한 철에서 다른 한 철로,

이것이 여행이라면 빨리 다른 곳에 닿고 싶다

비가 오나 보다

젖은 것들이 내 안에서

안개가 되어 피어오른다

사람 이전

깊은 중력의 물기를 머금고 올라오는

푸르고 푸른 감각들,

깊은 상처 위에 혓바닥을 대본다

더 따뜻하게 비를 맞고 서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우대식 시인 / 사라진 역

 

 

카스테라 봉지를 뜯던 여자가 있었다

주홍빛 망에 담긴 계란이 빛나던 시절

허기진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먹고 있었다

역에서 사람들은 나누어 먹는 연습을 했던 것

부자들은 역을 줄였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역을 폐쇄했다

나누어 먹는 연습을 할 곳이 사라졌다

 

 


 

 

우대식 시인 / 모자란남움직씨

-불완전타동사를 위한 변명

 

 

불완전타동사의 우리말은 모자란남움직씨

모자란 채 움직여야 하는 언어의 운명

그 무언가를 만나야만 의미가 되는 쓸쓸함 앞으로

도원경(桃源境)이 흘러가고 기린(麒麟)도 지나가지만

무엇 하나도 잡을 수 없다

모자란남움직씨인 내 필설로는

내 눈을 찌를 길밖에는 없다

모자란 채 흘러가야 하는

그러나 끝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내 푸른 사상,

 

-『단검』(실천문학사,2007)

 

 


 

 

우대식 시인 / 오리(五里)

 

 

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五里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五里,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五里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五里만 가면

五里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우대식 시인 /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아내의 가슴에서

못 자국 두 개와 일곱 개 선명한 선이

발견되었다

 

못 자국 두 개의 출처는 내 분명히 알거니

빗살무늬 상처는 진정 알지 못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해변에서 보낸

나날들의 기록인가 생각해보았다

 

혹 주막에서 보낸 내 생을

일이 년 단위로 가슴 깊이 간직한 탓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생의 싸움터를 헤매인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저의 가슴에 저토록 선명한 상처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가

 

나 바다에서 죽음을 꿈꾸었을때

그는 지상에서 죽어갔던 것

 

 


 

 

우대식 시인 / 뻥의 나라에서

 

 

초등학교 3학년 막내와 돈키호테를 읽는 밤

11월 바람은 창을 두드리고

키득키득 책을 읽던 놈이

불현듯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그와 깊은 가을로 여행하는 중이다

뻥의 마을에서 서성이다가

어린 그와 목로주점에 들어

설탕을 듬뿍 탄 와인을 한 잔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면

창을 꼬나들고 달리는 늙은 기사도 만날 것이다

도무지 세상에는 없는

공주들과 긴 늦잠을 자고

풍차 아래서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살 수 없음을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중세의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픈 것이다

 

 


 

 

우대식 시인 / 낡고 깨끗한 방

 

 

강원도 산간

낡고 깨끗한 방안에 들어 윗묵에 놓인

멍석이며 멧방석이며 홍두깨를 바라보다,

내 할머니며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고양이 발목을 적시던 빗물도 가끔

창호문을 두드리다 문득 눈물처럼

번지기도 하는 것이다

황매화, 백매화 우두커니 비를 맞는

만춘의 먼 뜨락,

불두화 아래 지나가는 뱀처럼

나 죄가 많다

연당, 연하, 예미, 자미원, 별어곡, 나전, 여랑, 구절

석탄으로 멱을 감은 태백선 간이역

슬픈 향가는 내 몸에 박혀

木魚 배지느러미 아래 앉아

흐린 발등을 닦아 보기도 하는 것이다

따뜻한 이 방 안에 누워

먼 바다 집어등을 켜든 한 척의 배가 되어

망망대해의 어지러운 꿈속을 헤매다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어미 잃은 검은 고래가 되어 등을 지지며

낡고 깨끗한 방안에 누워 있곤 하는 것이다

 

 


 

 

우대식 시인 / 꿈

 

 

꿈을 꾸었다. 두 눈이 멀어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꿈.

문득 아내도 아이들도 없고 지팡이 하나만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누가 내 손에 이것을 쥐어 주었을까.

혹 나를 버리며 건넨 마지막 위무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눈이 먼다는 것은 깊은 슬픔이었다.

말을 건네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산동지방의 방언 같기도 하고 깊은 산맥에서 울려나오는 잔향 같기도 하였다.

차라리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으면 바라기도 하였다.

옹달샘에 이르러 찬물로 목을 적시고 바위에 앉아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날아가며 어깨를 툭 치기도 하였다.

눈이 먼 내가 눈을 감고 어느 먼 봄날의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낡고 화려한 문양의 천을 걸친 늙은 여자가 내 몸을 지나갔다.

천산 산맥이 하얗게 보이는 천막 밖에는 포도가 부드럽게 가지를 뻗고 바람은 나를 일으켰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꿈속에서 내 이름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살아야 한다.

지팡이를 짚고 벌떡 일어서다 잠이 깬 음력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아주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9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천년의시작, 2003) 와 『단검』『설산 국경』 그리고 그 밖의 저서로는 『해방기 북한 시문학론』(2005)이 있음. 「해방기 북한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현재 평택 진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中. 숭실대 국문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