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식 시인 / 수레바퀴 아래서
비가 오는 가을 국화 옆에서 내 몸도 시드나 보다 지상에서 사람을 만나 몇은 이별을 하고 몇은 남았다 쇠살로 된 수레바퀴 아래서 한 철에서 다른 한 철로, 이것이 여행이라면 빨리 다른 곳에 닿고 싶다 비가 오나 보다 젖은 것들이 내 안에서 안개가 되어 피어오른다 사람 이전 깊은 중력의 물기를 머금고 올라오는 푸르고 푸른 감각들, 깊은 상처 위에 혓바닥을 대본다 더 따뜻하게 비를 맞고 서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
우대식 시인 / 사라진 역
카스테라 봉지를 뜯던 여자가 있었다 주홍빛 망에 담긴 계란이 빛나던 시절 허기진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먹고 있었다 역에서 사람들은 나누어 먹는 연습을 했던 것 부자들은 역을 줄였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역을 폐쇄했다 나누어 먹는 연습을 할 곳이 사라졌다
우대식 시인 / 모자란남움직씨 -불완전타동사를 위한 변명
불완전타동사의 우리말은 모자란남움직씨 모자란 채 움직여야 하는 언어의 운명 그 무언가를 만나야만 의미가 되는 쓸쓸함 앞으로 도원경(桃源境)이 흘러가고 기린(麒麟)도 지나가지만 무엇 하나도 잡을 수 없다 모자란남움직씨인 내 필설로는 내 눈을 찌를 길밖에는 없다 모자란 채 흘러가야 하는 그러나 끝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내 푸른 사상,
-『단검』(실천문학사,2007)
우대식 시인 / 오리(五里)
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五里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五里,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五里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五里만 가면 五里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우대식 시인 /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아내의 가슴에서 못 자국 두 개와 일곱 개 선명한 선이 발견되었다
못 자국 두 개의 출처는 내 분명히 알거니 빗살무늬 상처는 진정 알지 못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해변에서 보낸 나날들의 기록인가 생각해보았다
혹 주막에서 보낸 내 생을 일이 년 단위로 가슴 깊이 간직한 탓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생의 싸움터를 헤매인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저의 가슴에 저토록 선명한 상처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가
나 바다에서 죽음을 꿈꾸었을때 그는 지상에서 죽어갔던 것
우대식 시인 / 뻥의 나라에서
초등학교 3학년 막내와 돈키호테를 읽는 밤 11월 바람은 창을 두드리고 키득키득 책을 읽던 놈이 불현듯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그와 깊은 가을로 여행하는 중이다 뻥의 마을에서 서성이다가 어린 그와 목로주점에 들어 설탕을 듬뿍 탄 와인을 한 잔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면 창을 꼬나들고 달리는 늙은 기사도 만날 것이다 도무지 세상에는 없는 공주들과 긴 늦잠을 자고 풍차 아래서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살 수 없음을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중세의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픈 것이다
우대식 시인 / 낡고 깨끗한 방
강원도 산간 낡고 깨끗한 방안에 들어 윗묵에 놓인 멍석이며 멧방석이며 홍두깨를 바라보다, 내 할머니며 어머니의 쓸쓸한 죽음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고양이 발목을 적시던 빗물도 가끔 창호문을 두드리다 문득 눈물처럼 번지기도 하는 것이다 황매화, 백매화 우두커니 비를 맞는 만춘의 먼 뜨락, 불두화 아래 지나가는 뱀처럼 나 죄가 많다 연당, 연하, 예미, 자미원, 별어곡, 나전, 여랑, 구절 석탄으로 멱을 감은 태백선 간이역 슬픈 향가는 내 몸에 박혀 木魚 배지느러미 아래 앉아 흐린 발등을 닦아 보기도 하는 것이다 따뜻한 이 방 안에 누워 먼 바다 집어등을 켜든 한 척의 배가 되어 망망대해의 어지러운 꿈속을 헤매다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어미 잃은 검은 고래가 되어 등을 지지며 낡고 깨끗한 방안에 누워 있곤 하는 것이다
우대식 시인 / 꿈
꿈을 꾸었다. 두 눈이 멀어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꿈. 문득 아내도 아이들도 없고 지팡이 하나만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누가 내 손에 이것을 쥐어 주었을까. 혹 나를 버리며 건넨 마지막 위무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눈이 먼다는 것은 깊은 슬픔이었다. 말을 건네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산동지방의 방언 같기도 하고 깊은 산맥에서 울려나오는 잔향 같기도 하였다. 차라리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으면 바라기도 하였다. 옹달샘에 이르러 찬물로 목을 적시고 바위에 앉아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날아가며 어깨를 툭 치기도 하였다. 눈이 먼 내가 눈을 감고 어느 먼 봄날의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낡고 화려한 문양의 천을 걸친 늙은 여자가 내 몸을 지나갔다. 천산 산맥이 하얗게 보이는 천막 밖에는 포도가 부드럽게 가지를 뻗고 바람은 나를 일으켰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꿈속에서 내 이름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살아야 한다. 지팡이를 짚고 벌떡 일어서다 잠이 깬 음력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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