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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민주 시인 / 울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6.

양민주 시인 / 울력

 

 

  배고개 길목 상엿집에

  늙은 땅꾼이 살았다

  겨울이 되어 그 모습 보이지 않아

  이장이 들여다보았더니

  이불을 덮은 채 얼어 죽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여들어

  가마니에 시체를 말아

  생이골 양지쪽에 묻어주었다

  햇살이 조문하고 지나가는 날

  여우비 내리고

  보리가 푸르게 푸르게 자랐다

  그 영혼이

  보리를 키워준다고 생각했다

 

 


 

 

양민주 시인 / 낙동강

 

 

  아버지는 흐리고 조용합니다 태풍의 전조입니다 아버지의 보리밭이 썩은 물에 침식되어갑니다 밭둑가 버드나무 잎은 숨이 죽어 작은 떨림도 없습니다 땅뙈기는 아버지의 가슴입니다 물은 자라서 누런 이빨을 드러냅니다 홀로 피어 있는 꽃을 봅니다 수장되기 전의 꽃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습니다 아버지는 비가 올 적마다 강가에 나갔습니다 멀리 먹구름이 피어오르자 물은 자꾸만 자라납니다 보리밭의 경계는 흐르지 않는 물입니다 아버지는 보리 베던 낫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물이 발목을 삼키자 낫으로 물을 내려찍습니다 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더욱 사납게 커져 올 뿐입니다 아버지도 더욱 사나워졌습니다 윗옷을 벗어 던지고 물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후려칩니다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구경나온 바람은 떼거리로 잠잠합니다 떨어져 나간 바람은 어스름 저녁 안개의 먹잇감입니다 아퀴지을 듯 아버지는 물의 뱃속으로 들어가 창자를 쥐어뜯었습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아버지보다 강했습니다 아버지의 손에는 보리이삭이 한 움큼 잡혀있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지친 아버지는 흐리고 조용합니다

 

 


 

 

양민주 시인 / 리좀, 의자에 관한 단상

 

 

  귀갓길 돌아갈 곳 없는 의자는 홀로 낯선 거리를 떠돈다 내 의자 옆엔 같은 크기의 의자가 있다

소주를 든 아내가, 비 오는 날 학원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가,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심어진 화분이 앉기도 했다 노을 한 자락 지나갔다 의자에 앉아 발을 움직이면 부르릉부르릉 소리 내며 마음먹은 대로 펼쳐지는 풍경들, 처진 어깨로 책가방 메고 학원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낯익은 얼굴이 노을처럼 붉게 웃고 있다

 

  아버지는 의자 위에 노을을 얹어 집에 왔다 아버지 의자 뒤엔 더 큰 노을이 앉은 의자가 있다

때론 내가, 때론 동생이, 때론 씨암탉이 앉기도 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움직이면 차르륵차르륵 소리 내며 마음먹은 대로 갔다 아버지의 옷에선 풀떼기 향기가 났다 가끔은 삼거리 주막집 아줌마 분 냄새가 나기도 했다 세상의 의자이신 아버지

 

 


 

 

양민주 시인 / 리좀, 상량을 그리다

 

 

아버지는 상량문을 쓰고 계셨다

태극을 그리고 삼각을 그리고

용(龍)과 귀(龜) 적으실 때

나는 잘려나간 동량을 굴리며 마차놀이를 했다

아버지의 붓 위로 마차는 달렸다

손사래 치시는 아버지, 잠자코

용을 날려 보내고 거북을 방생하셨다

 

새가슴 졸인 무아의 순간

대지의 대접젖을 물고 꼬박꼬박 졸던

마당 가 석류나무 불거진 눈을 뜨고

가두어진 용이 움츠린 거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배흘림기둥으로 흘러내리는

관속에 누운 아버지, 거북처럼 고요하다

그리움 용머리처럼 치뜨는 불,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며 운다

높이 뜬 아버지의 상량

걸어가는 하늘의 풍채를 본다

나는, 용과 거북을 앞세워 아버지를 새긴다

 

 


 

 

양민주 시인 / 큰 산의 어머니

 

 

비닐하우스에서 허리가 굽어진 여인

갈매색 작은 수박을 보고 웃는다

웃음소리 얼마나 크던지 고성 연화산 옥천사

대웅전 아미타삼존옥불 미소를 띤다

 

벌어진 노란 꽃은 여인의 손을 거치며 오므라들고

그 밑으로 탱탱한 열매가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

식구가 늘어나는 셋째 딸 뱃속 외손자 그려본다

겨울에도 초원 같은 수박밭은 자손을 늘렸다

 

때론 지쳐 그은 얼굴에 굵은 땀방울 맺히지만

발걸음 소리 들으며 커가는 수박에 중독되었다

한 몸으로 수박이 되었다가 허연 머리통이 되었다가

손짓으로 이름을 부르면 굽은 허리 펴고

빙긋이 웃는 허수아비가 되었다가

 

비닐하우스는 죽음을 향해 떠나가는 배

북서풍 불고 비닐하우스 위로 눈발이 날렸다

수박은 탈이나 시듦병이 나고 평생 얼굴 마주하고 살던

여인도 병이 나 수의 입고 악수(幄手)하고 멱목(?目)한 채

염포(殮布) 묶인 버선발로 꽃신 신고 눈 덮인 산으로 갔다

 

상여에 노잣돈을 달며 울면서 따라갔던 사람

수박 한 통 어깨에 메고 붉은 완행버스 타고 집으로 간다

아내의 얼굴과 뱃속의 자식이 문득문득 스쳐 지나가던

무거운 수박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던 그때

산꼭대기에 허연 눈을 이고 있던 커다란 산

 

 


 

양민주 시인

1961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 인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2006년 《시와 수필》을 통해 수필로, 2015년 《문학청춘》을 통해 시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수필집 『아버지의 구두』와  시집 『아버지의 늪』(황금알, 2016)이 있음. 현재 김해문인협회 회장이며 인제대학교 문리과대학 행정실장. 2015년 제11회 원종린수필문학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