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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시화 시인 / 새와 나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3.

류시화 시인 /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류시화 시인 / 꽃등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류시화 시인

1958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본명은 안재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80년 시 〈아침〉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 1980~1982년 박덕규·이문재·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를 다수 썼지만 1983년 활동을 중단. 이후 류시화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명상서적을 번역했고, 1988년부터 미국,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거나 인도 여행을 하며 라즈니쉬의 명상서적을 번역했다.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6),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2012)를 출간. 경희문학상(2012)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