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덕 시인 / 소나무
내원사 계곡. 백 년 묵은 소나무 한 그루 쓰러져 있다. 가지를 찢고 뿌리를 뽑아 올린 바람은 간 곳 없고 솔이파리 누릇누릇 땡볕에 타고 있다. 소나무는 눈을 뜨고 서서히 죽어가는 제 몸을 바라본다. 물소리는 뿌리를 적시지 못한다. 저 놈의 목에 밧줄을 걸고 기중기로 끌면 일어 설 수 있을까
병든 노모에게 속옷을 입힌다. 거웃이 사라져 밋밋한, 여섯 번의 열매를 맺은 그곳, 시든 꽃잎 한 장 접혀있다. 졸아든 볼기에 미끈덩 여섯 개의 보름달을 받아 안던 찰진 흔적이 남아있다. 노모가 눈으로 말한다. 내가 베어지면 그 등걸에 앉아 편히 쉬거라. 머리맡에 고요히 틀니가 놓여있다. 앙상한 두 다리 분홍양말이 곱다. 기울어 가는 소나무, 반쯤 뽑힌 뿌리에 링거를 꽂는다.
-2003년 현대시학 2월호
마경덕 시인 / 밤송이
수많은 호위병이 겨누는 날이 선 창(槍)을 보아라. 사력을 다하는 충실한 부하들은 빈틈없이 성을 에워쌌다. 둘러봐도 출구가 없는,
완벽한 저 가시의 城
누군가 고슴도치 갑옷을 빌려 입고 칩거 중이다
2003년 문학마을 / 계간 <시향> 재수록
마경덕 시인 / 성북동 가는 길
이 동네의 주인은 높은 담이다
세콤이나 캡스를 달고 낯선 방문자를 가려낸다. 드디어 담도 사람처럼 생각을 갖게 된 것. 생각이 늘어나자 불안이 담을 쌓고 문을 걸었다. 성(城)처럼 우뚝한, 담은 이제 벽이다. 벽은 골목길 야채를 파는 리어카와 떨이를 외치던 생선장수를 밀어내고 제 키보다 높은 지붕을 끌어내렸다. 벽뿐인 동네는 벽끼리 논다. 금을 긋고 등을 지고 건너편 벽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컹컹, 개 짖는 소리만 벽을 타고 넘는다. 담 높은 집의 힘센 개들은 오줌을 갈기며 골목을 쏘다니는 똥개처럼 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높아서 더 불안한, 거만한 벽은 끝까지 벽만 보여준다.
-역사와 문학 (200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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