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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희 시인 / 구름 죽죽 찢어먹는 여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3.

송희 시인 / 구름 죽죽 찢어먹는 여자

 

 

사내가 물어다준 구름덩어리

가닥가닥 쭉쭉

찢어먹는 한 여자를 알지.

잡히는 대로 찢어 혀에 감는 여자,

놓쳐버린 뜬구름

다시 잡고 싶은 여자,

가물한 꿈의 쪽문 고리

더듬더듬 찾고 있는 여자,

미아가 된 구름무덤을 콕콕 파고 있었지.

뼈를 발라내고 있었지.

또아리 튼 천둥번개가 고물고물 묻어 나왔지

달콤함이 갈갈이 찢어져 머리채 뽑힐 때까지

계속 뜯고 있는 여자,

빈약한 꿈의 뼈다귀 들고

쪽쪽 입맛 다시는 여자,

손가락 끝에 묻은 피고름까지

핥아먹는 여자,

부수어도, 부수어도

구름은 무너지지 않았지.

먹어도, 먹어도 헛배였지.

핑크 파랑 노랑 솜사탕을

몇날 며칠 뜯고 있는 여자를 알지.

이빨 다 빠지고

쓴물 단물 다 깨진 여자가

구름에 걸려 떠내려갔지.

 

 


 

 

송희 시인 / 물듦

 

 

산책길에서 곱게 늙은 단풍을 따

물 항아리에 띄웠다.

동動

동動

동動

잎은 잠깐 시간을 구르더니

빛, 바람, 소리, 벌레발자국까지

제 가졌던 것을 죄다

다시

물에 풀어내는 거다.

붉다,

붉어

물든다는 건

바람에 젖은 갈대가 휘파람을 불게 되는 것.

천만 년 쓸린 바닷돌이 파도소리를 갖게 되는 것.

야문 손톱에 들어온 봉숭아 꽃잎이 첫사랑을 놓지 않는 것.

물든다는 건

내게 건너오도록 온전히 비우는 것이다.

 

 


 

 

송희 시인 / 어스름

 

 

허공 곳곳에서 희뿌연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낮의 눈자위가 움푹 꺼질 무렵

 

종일 갈아엎은 논을 뒤꼭지에 매단 소는 밥 연기 몰리는 마을로

어슬렁어슬렁 내려간다.

 

강둑을 두고 가는 게 영 쓸쓸해서 발길에 길이 차인다.

턱 끝까지 끌어 덮고 드러눕는다.

철렁, 물속 산들 빠져나간 강바닥이 패이며 설픗 수심이 얕아진다.

 

강물의 길도 울렁거린다.

 

흑백과 안팎이 뒤바뀌려 엉기는 것이, 영 놀랍지 않아

 

어둠은 한 발 더 다가오고 강물 속 별이 돋으려 수면 곳곳

움찔거린다.

 

커다란 소의 눈동자에 담긴 길이 껌벅껌벅 끊어져도 흰 그림자

먹어치우며 저녁은 건달처럼 온다.

 

 


 

송희(宋熹) 시인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1996년 『자유문학』 등단. 시집 『탱자가시로 묻다』 『설레인다 나는, 썩음에 대해』 『고래 심줄을 당겨 봤니』. 가족 치유 명상집 『사랑한다 아가야!』 등. 2003년 전북시인상, 전북문학상 수상. 前 전북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