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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여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3.

도종환 시인 /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도종환 시인 / 가구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는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작가세계 (2004년 봄호)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