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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마늘처럼 맵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3.

길상호 시인 / 마늘처럼 맵게

 

 

생각없이 마늘을 찧다가

독한 놈이라고, 남의 눈에 들어가

눈물 쏙 빼놓고 마는 매운 놈이라고

욕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단한 알몸 하나 지키기 위해

얇은 투명막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야 했다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칼자루 밑에

닭살처럼 소름 돋은 통 속에서

짓이겨진 너의 최후를 떠올려야 했다

 

내가 밀어 올렸던 줄기들 뽑혀 가던 날

거세당한 사내처럼 속으로 울던

뿌리들의 고통 잊어버리고

기껏 눈물 한 방울이 무엇이기에

누구를 욕하고 있단 말인가

독하면 독할수록 맛이 나는 게

그런게 삶이 아닌가, 저 마늘처럼

모든 껍질 벗겨지고 난 뒤에도

매운 오기로 버티는 게 삶이 아닌가

 

시집 -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길상호 시인 / 집들의 뿌리

 

 

어디로 이어졌는지 아직 다 걸어보지 못한

골목들은 거기 감자처럼 달려 있는 집의 뿌리였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골목은

기쁨과 슬픔을 실어 나르던 체관과 물관이었다

 

다 허물어져 알아볼 수도 없는 이 집에 들어

 

대문을 열고 드나들었을 사람들 떠올려보면

 

지금은 떨어져 버린 기쁨과 슬픔의 열매가 보인다

막 화단에 싹틔운 앵두나무에는 나무를 심으며

앵두꽃보다 먼저 환하게 피었을 그 얼굴이 있다

마루에 앉아 부채질로 하루를 식히다가 발견한

그 붉은 첫 열매는 첫입맞춤의 맛이었을까

그러나 저기 마루 밑에 버려진 세금고지서 뭉치,

대문에 꽂힌 저 종잇장을 들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는 누렇게 변색된 나뭇잎 하나 걸려 있다

체납액이 커질수록 가뭄처럼 말라가던 가슴은

지금도 금 간 흔적을 지우지 못하리라

 

어쩌자고 골목은 나를 빨아들여

사람도 없는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오래도록 먼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내가 드나들던 집에 나는 기쁨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물기 잃은 잎처럼 시들해진다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와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우리의 죄는 야옹』외. 사진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김종삼 시문학상 등 수상. 2004년 '현대시동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