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호 시인 / 마늘처럼 맵게
생각없이 마늘을 찧다가 독한 놈이라고, 남의 눈에 들어가 눈물 쏙 빼놓고 마는 매운 놈이라고 욕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단한 알몸 하나 지키기 위해 얇은 투명막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야 했다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칼자루 밑에 닭살처럼 소름 돋은 통 속에서 짓이겨진 너의 최후를 떠올려야 했다
내가 밀어 올렸던 줄기들 뽑혀 가던 날 거세당한 사내처럼 속으로 울던 뿌리들의 고통 잊어버리고 기껏 눈물 한 방울이 무엇이기에 누구를 욕하고 있단 말인가 독하면 독할수록 맛이 나는 게 그런게 삶이 아닌가, 저 마늘처럼 모든 껍질 벗겨지고 난 뒤에도 매운 오기로 버티는 게 삶이 아닌가
시집 -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길상호 시인 / 집들의 뿌리
어디로 이어졌는지 아직 다 걸어보지 못한 골목들은 거기 감자처럼 달려 있는 집의 뿌리였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골목은 기쁨과 슬픔을 실어 나르던 체관과 물관이었다
다 허물어져 알아볼 수도 없는 이 집에 들어
대문을 열고 드나들었을 사람들 떠올려보면
지금은 떨어져 버린 기쁨과 슬픔의 열매가 보인다 막 화단에 싹틔운 앵두나무에는 나무를 심으며 앵두꽃보다 먼저 환하게 피었을 그 얼굴이 있다 마루에 앉아 부채질로 하루를 식히다가 발견한 그 붉은 첫 열매는 첫입맞춤의 맛이었을까 그러나 저기 마루 밑에 버려진 세금고지서 뭉치, 대문에 꽂힌 저 종잇장을 들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는 누렇게 변색된 나뭇잎 하나 걸려 있다 체납액이 커질수록 가뭄처럼 말라가던 가슴은 지금도 금 간 흔적을 지우지 못하리라
어쩌자고 골목은 나를 빨아들여 사람도 없는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오래도록 먼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내가 드나들던 집에 나는 기쁨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물기 잃은 잎처럼 시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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