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후 시인 / 쓸쓸한 날에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타전할지 모르므로
강윤후 시인 / 옛 골목에서
햇빛이 흐르는 대로 길이 트인다 나는 술래라도 된 듯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어린 날의 기억들은 꼭꼭 숨어 버려 머리카락조차 들키지 않고 블록 담벼락은 글자가 씻겨 나간 필사본 같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비가 이 골목을 지나갔을까 내 오래된 수첩도 젖고 마르기를 거듭하여 막다른 기억들로 얼룩져 있다 지워진 글자를 판독하듯 담벼락에 손바닥을 얹고 걷는다 차단된 세월의 저편에서 다른 손바닥이 담벼락을 쓸며 지나간다 나는 누군가와 손바닥을 맞댄 채 걷는다고 상상해 본다 문득 햇빛이 흐름을 멈춘다 모르는 글자들이 손바닥을 통해 몸 안 가득 주입된다 나를 따르던 그림자가 내게서 손을 떼고 저 혼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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