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숙 시인 / 어물전에서
질퍽이는 바닥을 피해 어물전에 들어섰다 작은 수족관 속에서 대게 몇 마리 서로 발이 엉켜 뒤틀고 있다 양푼 속에선 바지락조개들 간간이 물을 뿜으며 철없이 놀고 주인 아지메가 남은 생태 몇 마리를 떨이로 넘기려는지 무지막지한 꼬챙이로 아가미를 찍어 벌린다 이보요,빨갛지. 눈깔은 또 어떻고... 말간 생태 두 눈에 피가 맺혀있다 어린 놈이다
떡판처럼 우직한 통나무 위에 찍어둔 시퍼런 칼날 단연 이 어물전에 실세지만 난자 당한 도마를 씻느라 바가지 가득 물을 끼얹을 때마다 파도소리를 듣는다 미끈한 갈치도 고등어도 약간 물간 오징어도 그 소리를 들었다 더 큰 놈은 없소? 주인은 들은 체도 안하고 한 마리 더 얹어준다는 걸쭉한 호객뿐, 그래도 팔다 남은 놈 있으면 배 갈라 쫙쫙 소금 뿌려 자반으로 넘긴다
차양 너머로 금빛 노을이 파장을 부를 때쯤 사람들은 우루루 기다렸다 모여들고 동물이나 사람이나 마주보고 탐색전을 벌이다 저 같은 놈 만나 끼리끼리 어울리듯이 너희에겐 그게 딱이야! 작은 이 시장에 불문율 하나 슬픔처럼 내 걸린다
돌아오는 길 생선가게 뿌연 TV속에서 수많은 갈치 고등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비린내나는 대선후보들의 논쟁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주인여자가 껌을 질겅이며 돈을 세고 있었다
고경숙 시인 / 석류
발정기에 들어선 원숭이떼가 엉덩이를 까고 놀리는 줄 알았다. 빨간 석류, 아니 차도르 쓴 여자의 은밀한 곳처럼 검붉다는게 정확하겠지 '이란産' 딱지 하나씩 엉덩이에 붙이고 위장한 여전사들 어쩌면 저속엔 투명한 탄환알갱이들이 가득 숨겨져 있을지 몰라 허름한 시장통 경계 느슨한 그 곳에서 미제에 물든 내 뱃속을 향해 기습테러를 계획하고 있는 낯선 무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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