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일 시인 / 샤먼의 그림자
너에게 입사한다
목소리가 혼잣말보다 흐릿할 때 어김없이 너에게로 쓰러지지
이미 길어질 대로 길어져서 길쭉한 너와 내가 몇 번째 마주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1센티만 더 와 줄래? 구경만 하지 말고……
간곡한 간격
흑백일 수밖에 없는 우리 목소리를 만질 수 없지만 포개졌다
마른 체온의 까만 근육을 부풀리는 영(靈)을 베고 누워 기침을 한다 감정 없이 우리가 되자
마른 냄새를 나눠 덮는다 간신히 그러나 간절하게 병을 나누려면 가장 가까워야 하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까지 몸피를 나누어 갖는 희미한 불빛에서 아픈 밤
너는 한 번도 다른 색을 가져 보지 못했다
권정일 시인 / 어머니는 수묵화였다
그때 나는 세모시 저고리에서 달빛보다 더 선연한 바늘의 등뼈가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열 손가락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묵화처럼 가지런한 이마가 환한 빛을 내던 토방 쪽마루를 보았다
어머니 반짇고리 곁에는 내가 이름 지어준 별들이 내려와 집을 짓곤 했다 못에 찔려 피 흘리던 내 꿈들 우리 집 추녀 끝에 밤마다 찾아드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한 채 섬이 된 우리 집 마당으로 물방울처럼 별 하나, 별 둘 똑똑 떨어지는 기척이 있었다 옛날 이야기가 섬이 되어 떠다니고
푸른 슬레이트 지붕이 녹스는 소리마저 정겨운 여름밤이었다 흑싸리 화투패 같은 빈 껍질의 어머니 가슴에서도 녹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쩜 그것은 내 가슴팍을 적시는 물살이었다 추깃물 같은 반딧불이 우리집 낮은 담장 너머에서 몇 번 어둠을 흔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1999년 국제신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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