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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희 시인 / 지구를 가지고 흥정하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2.
송희 시인 / 지구를 가지고 흥정하다

송희 시인 / 지구를 가지고 흥정하다

 

 

 못 이기는 척, 사고 팔기 민망한 지구를 가지고 흥정을 했다 누군가 거미줄 쳐놓은 네모 반듯한 허공 몇 평을 샀다 더 커다란 덤이 얹어졌다 창밖을 둘러친 소나무 병풍과 새와 벌이 물어오는 톡쏘는 꿈이다

 이사를 했다 이른 아침이면 끈질긴 생각통을 소나무에 내건다

 단내 쓴내 나는 마음의 먹이들을 꺼내 헛꿈을 꾸어보고 이것 저것판결을 내려보고 불륜도 저지르다 끝내 연노랑 나비도 된다 마침내 배가 부르다

 식곤증에 나른해진 생각통을 벌떼 바람 덤벼들어 온통 벌집 쑤시면 두꺼운 소음들 걷혀 솔가지마다 불이 켜진다 나와 나 사이에 겨우 플러그가 생긴다

 누군가 지구에 슬쩍 던져놓은 덤이란 예상치 못한 횡재다 가까이 솔이 덤으로 푸른데도 난 붉은 눈을 하고 늘 나와 흥정 중이다

 

 


 

 

송희 시인 / 비오는 날. 막걸리 한잔 치자

 

 

봄 안개비 내리는 날은

밤의 속살도 뽀얗다

맛좋은 사람들과 주점에 앉아

푹 썩어 문드러진 홍어탕에

막걸리 한잔 치는 건

홀딱 젖는 일이다

이미 나태해진 그리움도

폭풍처럼 벽을 뚫는 밤

이 비가 그치면 단숨에

봄이

퍽 터지겠다

 

시집 - 탱자가시로 묻다 (시와시학사)

 

 


 

 

송희 시인 / 별장관에게 보냄

 

 

-라디오에서 들었는데요 우린 별에서 왔다고 흔히 그러잖아요 자기 안에 별 하나씩 숨어 있는데 께름직한 일을 할 때마다 양심이 찔리는 것은 별이 뾰죽한 끝으로 콕콕 찌르기 때문이래요 나쁜 짓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잘못을 하도 많이 저질러 별 끝이 다 닳아 동그랗게 마모되었기 때문이래요

 

당신이 기억할지 모르지만 저는 원래 그곳에서

내려와 빛이 바랜 조각입니다

 

가만 몸 굴려보면 아직 따끔거리긴 한데 제 별을

제가 볼 수 있어야지요

 

살아온 세월이 만만치 않아서요

 

별무리에 여러 장관이 있지만 면식이 제일 많은

플레아데스 성단(星團)에 외칩니다

 

별 장관님, 부디 작은 별조각이라도 하나 내려 주세요

이번엔 오래오래 아껴 쓸게요

 

우주에 아무런 공헌도 없는 내게 새별을 보낼리도

없겠거니와

 

별이 아주 동그랗게 마모된 사람은? 아예 닳지 않은

쇠별을 줄지도 모르거니와

 

이젠 별보기도 엄청 두렵거니와

 

-시집 <탱자가시로 묻다> (2004년 시와시학사)

 

 


 

 

송희 시인 / 어떤 순교, 후

 

 

동백꽃 한 송이를 덥썩,

보쌈했습니다

하얀 비닐봉지 속에서

잎이 더 파르르 하더니

잠깐 숨이 멎었습니다

시집갈 때 철없이 주워 입은 내 옷

붉은 저고리에 초록 치마만 같아서

손부터 가고 말았습니다

헌데 딱 하루 만에 툭,

제 모가지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시집 간 날 한 번 입은 내 옷처럼

그날 이후론 잃어버린 내 이름처럼

그 짧은, 목을 혀로 쓸었습니다

아아, 달콤하고 새콤하였습니다

제 모습을 싹뚝 지우는 것이

그렇게나 통쾌한 일인지

얼굴 없는 동백,

치마만 질끈 동여매고도

밥주걱 하나만 있으면

힘이 솟는 어머니처럼

의기양양입니다

 

어떤 순교* 후처럼

뚝, 뚝, 하얀 피를 흘렸습니다

 

*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이 불교를 받아들이라 간청하며 자신의 목을 치게 한 일화.

 

 


 

송희(宋熹) 시인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1996년 『자유문학』 등단. 시집 『탱자가시로 묻다』 『설레인다 나는, 썩음에 대해』 『고래 심줄을 당겨 봤니』. 가족 치유 명상집 『사랑한다 아가야!』 등. 2003년 전북시인상, 전북문학상 수상. 前 전북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