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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동범 시인 / 오랑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1.

조동범 시인 / 오랑

 

 

오랑. 저녁 식탁마다 평화로운 안부는 가득하고, 창문마다 저물녘의 일몰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 한다. 구름은 무심하고 미래는 누군가의 안위를 향해 모든 불길함을 버리려 한다. 오랑. 하수구를 배회하는 쥐 떼가 연민을 자아내는, 완벽한 저물녘이구나. 그리하여 오랑. 풍요로운 저녁 식탁을 앞에 두고 헤어진 연인의 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오래된 금기라고 누군가 말을 하려 한다. 오랑. 지중해의 바람이 아름답고 완전한 해변의 문양을 배회할 때,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흘러간 유행가를 허밍하려 한다. 하수구를 서성이는 쥐 떼는, 여전히 아름다운 오랑, 그곳의 해변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처럼, 해변은 어느새 잊을 수 없는 폐허를 상상하기도 하지. 예언서마다 죽음의 문장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저녁 식탁의 가족사는 행복했던 과거만을 기억하고 싶어지는구나. 지중해의 바람이 불어오면, 그곳은 아프리카의 어느 슬픔인가? 아니 먼 프랑스의 어느 마을인가? 식탁 위의 촛불은 행복한 가족사를 향해 타오르고, 감미로운 저물녘을 위해 저녁의 식사는 나른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려 한다. 지중해를 향해 저물고 있는 태양은 느리고 긴, 빛과 어둠을 망설이는 중이구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발굴되는 것들을 상상하며, 오랑. 우리는 그것이 폐허의 문장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폐허 이전의 역사는 폐허를 예언할 수 없는 법. 오랑.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상상하고 싶어지지 않는구나.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죽은 가족들의 무덤을 떠올리는 것처럼, 자꾸만 잊고 싶은 예언이 된다. 바람이 불어오면 식탁은 완벽한 저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선다. 그러나 오랑. 미래는 어느새 돌이킬 수 없는 폐허와 저녁을 향해 펼쳐지려 한다. 죽음의 문장처럼 오랑. 그리하여 완전한 저녁의 식탁이 영원토록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오랑.

 

* 오랑: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배경이 된 도시.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알제리의 항구도시이다.

 

-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천년의시작, 2021)

 

 


 

 

조동범 시인 / 금욕적인 사창가

 

 

 당신은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다. 버려진 콘돔과, 무감각한 당신의 마지막 자세가,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덧 오전 6시는 밝아오는가. 당신의 마지막 자세는 고개를 돌려, 남자가 빠져나간 자리의 텅 빈 허공을 감각한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곳에서, 휘파람은 오래전의 유적처럼 흐느끼고 있구나. 어느덧 오전 6시는 다가오고, 거룩하고 성스럽게 아침은, 여전한 어둠을 웅성거린다. 당신의 절정은 언제나 절제되어 있으며, 당신의 어제는 금욕적인 휴일 오전을 예비하며 무감각한 절망에 침묵할 뿐이다. 버려진 콘돔으로부터 당신의 마지막 자세는, 비릿한 절정의, 마지막 순간을 반추한다. 느리게 발기되는 성기처럼, 휴일 오전은 쉽게 도래하지 않는다. 정체된 고속도로마다 휴일 오전의 지리멸렬은 시작되고, 당신의 마지막 자세로부터, 열린 창문과 흔들리는 커튼은 이윽고 나른한 오전을 배회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금욕적인 휴일 오전이고, 당신의 마지막 자세는 금욕적인 모든 관계와 피크닉을 상상한다. 휴일 오전마다의 피크닉은 찬란한 하늘과 금욕적인 해안선의 한 끼 식사를 마련할 것이다. 신파처럼 한 모금의 담배는 피어오르는가. 당신의 마지막 자세만이 침대 위에서 고요히 울음을 터뜨리고 있구나. 그것은 아침상의 생선구이처럼, 혹은 미역국처럼, 그리고 흰쌀밥처럼 홀로 그곳에 남겨진다. 지리멸렬처럼 놓인 수건을 마지막으로 금욕적인 휴일 오전은 비롯될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 자세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금욕적인 휴일 오전을 위해 바쳐지고, 그것은 비릿한 콘돔이거나 생선구이, 혹은 미역국, 그리고 흰쌀밥.

 

 


 

 

조동범 시인 / 메일(male)

 

 

 그것은 무너질 수 없는 순간으로부터 시작됩니까. 카스트라토의 음역이 당신을 호명할 때, 이윽고 저녁은 기억할 수 없는 예언을 복기합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트리입니까. 아니면 오래전에 침몰한 누군가의 당신들입니까. 사건의 지평선에 갇힌 여성을 예감할 때, 오래도록 느려지는 지평선의 경계는 어둠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맞이할 수 없는 당신들의 저녁입니까. 그리하여 그것은 오래전에 당신을 향해 걸어들어간 누군가의 이복입니까. 사건의 지평선을 노래하며 카스트라토는 부풀어오르지 않는 가슴을 잠시 슬퍼합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당신들은 사건의 지평선을 흐느끼고 있습니까. 당신을 향해 사건의 지평선은 오래도록 느려지고, 모든 것을 감추고 어두워집니다. 책장에는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시집들이 가득하고, 창공에 가득한 별들을 떠올리는 당신은 그리하여 누구입니까. 완고한 아버지의 음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들의 심장을 찌른 아버지는 피 묻은 칼을 씻으며 저녁 식탁의 완전한 행복을 떠올립니다. 가슴을 풀어헤치면 그곳은 무덤입니까. 아니면 당신을 기약하는 미래입니까. 텅 빈 무대 위로 누군가는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수많은 당신들은 아침이 와도 소환될 수 없습니다. 곰장어를 굽는 포장마차에서 이별을 앞둔 연인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고, 어머니는 더 이상 밥을 짓지 않고 연인들은 이제 손을 잡지 않습니다. 지평선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만날 수 없는 서로의 미래만을 예감합니다.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그곳에서 당신은 정물처럼 고요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막차가 끊긴 지하철역에는 누구도 도착할 수 없습니까. 그리하여 카스트라토의 음역은 오래전에 거세당한 당신들의 이야기를 이미 잊었습니까.

 

 


 

 

조동범 시인 / 대륙횡단특급 1

 

 

 철도역마다 폭설이 내리고 겨울은 끝이 없습니다. 당신이 가버린 철길의 끝으로부터 얼어붙은 호수의 일몰은 황폐합니다. 적도 부근의 해변으로 날아가지 못한 한 마리 새는, 아직도 얼어죽고 있는 중입니다. 열대의 코코넛 나무는 바람에 나부끼고요. 철길 위로는 유폐된 폭설이 덜컹입니다.

 

 횡단의 끝은 알 수 없는 미래라고, 당신은 중얼거립니다. 기착지마다 날카롭게 벼린 황혼이 서늘합니다. 누구도 기착지에 하차하지 않습니다. 횡단의 끝이 알 수 없는 미래의 것처럼, 기착지의 밤은 불온하고 음습합니다. 횡단의 마지막은 승차권에 선명하지만 누구도 횡단의 마지막을 묘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진리를 믿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의 출생이 비밀인 것처럼 횡단의 끝은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철도원들은 선로를 거슬러 오르며 파업을 결의하고, 외계로부터 날아온 유성의 섬광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불에 탄 침엽수림이 철길을 향해 천천히 다가와, 이제는 잊힌 민요를 노래합니다. 기착지마다 불어오는 민요를 배경으로, 기차는 횡단의 끝이라는 미지를 향해 사라집니다.

    

 소문처럼 기차가 지나갔지만 누구도 기차를 보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기차를 보지 못했지만 기차는 여전히 대륙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철도역마다 얼어 죽은 새가 날아오르고, 호수의 일몰은 비릿한 태양을 삼키며 대륙횡단특급의 불온한 종착을 향해 경악합니다. 철길에는 적도로 날아가지 못한 철새가 죽음에 이르고 있고요. 오래전에 녹슨 철길마다, 두근거리는 기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시집 『금욕적인 사창가』(2016)에서

 

 


 

조동범 시인

1970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서울예대.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와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을 펴냄.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 서울예대, 중앙대, 한경대 등에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