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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미 시인 / 통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3.

김경미 시인 / 통화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좀 덜 슬플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오래 전 은동전 같던 어느 가을날의 전화.

 

너무 좋아서 전화기 째 아삭아삭 가을 사과처럼 베어먹고 싶던. 그 설운 한마디. 어깨 위로 황금빛 은행잎들 돋아오르고. 그 저무는 잎들에 어깨 집혀 생이라는 밀교. 밤의 어디든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던. 돌아와 찬 이슬 털며 가을밤. 나도 자주 잠이 오지 않았었다.

 

 


 

 

김경미 시인 / 나는야 세컨드 1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시집- 쉬잇, 나의 세컨드는

 

 


 

김경미(金京眉) 시인

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1989),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 1995), 『쉬잇,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1)『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2008) 등과 사진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