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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홍준 시인 / 깊은 밥그릇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5.

유홍준 시인 / 깊은 밥그릇

 

 

못쓰게 된 밥그릇에 모이를 담아

병아리를 기른다 병아리가

대가리를 망치처럼 끄덕거리며 모이를 쫀다

부리가 밥그릇 속에 뼈져 보이지 않는다

더 깊이 주둥이를 먹이에 박으려고

앞으로 기울어진 몸

발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깊은 밥그릇은, 병아리를 죽인다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실천문학사)

 

 


 

 

유홍준 시인 / 구석이 살아서 꿈틀, 한다

 

 

 닭이 쫓아간다 느려터진 날개를 가슴팍에 붙이고, 닭이 쫓아간다 모가지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 닭이 쫓아간다 천대받은 닭발이 돌부리를 걷어차며, 닭이 쫓아간다 쫓아가는 힘에 휘청, 헛발이 꼬인다 몸을 수습할 틈도 없이, 닭이 쫓아간다 이마 위의 볏이 벗겨질 듯 벗겨질 듯, 덜컹거린다 지상으로부터 가장 낮은 허공을 저 못난 부리로 내저으며, 닭이 쫓아간다 똥구멍을 바싹 오므리고, 닭이 쫓아간다 볼품 없는 깃털을 날리며, 닭이 쫓아간다 쫓아간 닭이 구석에, 쿡 처박힌다 구석이 어이쿠 닭을 받는다 오랫동안 꼼짝않고 있던 구석의 구석이 살아서 꿈틀, 한다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2004년 실천문학사)

 

 


 

유홍준 시인

1962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1998년 《시와 반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05년 한국시인협회 '제1회 젊은 시인상', 2007년 제1회 '시작문학상' 제2회 '이형기 문학상' 제2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현재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에서 사무국장. 순천대 문예창작학과와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강사로 출강. 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저녁의 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