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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영조 시인 / 감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8.

고영조 시인 / 감자

 

 

 감자를 먹고 있다. 논둑에 걸터앉아 농부들이 감자를 먹고 있다. 젓가락이나 포크 대신 순 맨손으로 감자를 먹고 있다. 살과 살을 부딪치며 몸과 몸을 부딪치며 모내기가 막 끝난 그들의 들판을 조금씩 베어먹고 있다. 바구니에 그득한 크고 작은 햇감자들 부끄러운 알몸을 천천히 벗기면서 맨손으로 감자를 먹고 있다. 감자의 젖가슴을 먹고 있다. 지금 막 태어난 처음의 말씀들 먹고 있다. 뜸부기가 우는 앞산을 바라보며 기우뚱 검게 그을린 감자의 얼굴들 흐린 물빛에 어려있다. 두 발은 무논의 진흙 속에 꽉 박혀 있다. 깊고 깊다.

 

 


 

 

고영조 시인 / 다리

 

 

 전화가설공 김씨는 공중에 떠있다. 그는 허공을 밟고 활쏘는 헤라클레스처럼 남쪽하늘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당길 때마다 봄 하늘이 조금씩 다가왔다. 공중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사랑해요. 화살처럼 달려가는 중이다. 붉은 자켓을 펄럭이며 그는 지금 길을 닦는 중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제비들이 어깨를 밟을 듯 지저귄다. 그는 허공과 허공 사이에 케이블을 걸고 벚나무 가지가 붉어질 때까지 죽은 기억들을 끌어당긴다. 허공을 밟을 때마다 목조계단이 바스라지며 가슴을 찌른다. 모든 언덕이 팽팽해진다. 살아오는 중이다. 말과 말 사이에 물길이 트이는 중이다. 중심이다. 닿을 수 없는 마음들이 물길에 실려 가는 것이 보인다. 그는 지금 허공을 밟으며 그대에게로 가는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시와사상, 여름호>

 

 


 

고영조 시인

1946년 경남 창원 출생. 1972년「어떤 냄새의 서설」을 현대시학에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 1986년「강에서」「이주 일기」「그해 봄날」「떠도는 섬」등 13편으로 제1회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당선. 시집「귀현리」「없어졌다」「감자를 굽고 싶다」「고요한 숲」「언덕 저쪽에 집이 있다」등이 있으며 그의 시를 작곡한 가곡집「감자를 굽고 싶다」가 음반으로 출반. 성산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창원 오페라단장, 경남 오페라 단장 역임. 1996년 제6회 편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