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조 시인 / 감자
감자를 먹고 있다. 논둑에 걸터앉아 농부들이 감자를 먹고 있다. 젓가락이나 포크 대신 순 맨손으로 감자를 먹고 있다. 살과 살을 부딪치며 몸과 몸을 부딪치며 모내기가 막 끝난 그들의 들판을 조금씩 베어먹고 있다. 바구니에 그득한 크고 작은 햇감자들 부끄러운 알몸을 천천히 벗기면서 맨손으로 감자를 먹고 있다. 감자의 젖가슴을 먹고 있다. 지금 막 태어난 처음의 말씀들 먹고 있다. 뜸부기가 우는 앞산을 바라보며 기우뚱 검게 그을린 감자의 얼굴들 흐린 물빛에 어려있다. 두 발은 무논의 진흙 속에 꽉 박혀 있다. 깊고 깊다.
고영조 시인 / 다리
전화가설공 김씨는 공중에 떠있다. 그는 허공을 밟고 활쏘는 헤라클레스처럼 남쪽하늘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당길 때마다 봄 하늘이 조금씩 다가왔다. 공중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 사랑해요. 화살처럼 달려가는 중이다. 붉은 자켓을 펄럭이며 그는 지금 길을 닦는 중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제비들이 어깨를 밟을 듯 지저귄다. 그는 허공과 허공 사이에 케이블을 걸고 벚나무 가지가 붉어질 때까지 죽은 기억들을 끌어당긴다. 허공을 밟을 때마다 목조계단이 바스라지며 가슴을 찌른다. 모든 언덕이 팽팽해진다. 살아오는 중이다. 말과 말 사이에 물길이 트이는 중이다. 중심이다. 닿을 수 없는 마음들이 물길에 실려 가는 것이 보인다. 그는 지금 허공을 밟으며 그대에게로 가는 푸른 다리를 놓는 중이다.
<시와사상,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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