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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수경 시인 / 정든 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7.

허수경 시인 / 정든 병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허수경 시인 / 저녁 스며드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 들이는 듯 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 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 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허수경(許秀卿. 1964~2018) 시인

1964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복간호에 시가 실리면서 등단.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과 수필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그리고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가 있음. 2?001년 동서문학상, 2016년 전숙희문학상과 '제15회 이육사문학상' 수상.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2018년 10월 3일 위암투병 중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