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함민복 시인 / 구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7.
제목 없음

함민복 시인 / 구혼

 

 

 불알이 멈춰 있어도 시간이 가는 괘종시계처럼 하체에 봄이 오지 않고 지난한 세월을 출근한 얼굴 장미꽃이 그 사내를 비웃었다 너는 만개하지 못할 거야 그 후, 시든 장미꽃이 다시 그 사내를 비웃었다 그래도 나는 만개했었어 이렇게 하초(下焦)가 부실해서야! 한 샐러리맨이 출근을 하다 활짝 핀 장미꽃을 보고 '아! 아름답구나'라고 감탄하자 장미꽃은 '너는 만개하지 못할 거야'라고 야유를 퍼붓는다. 또 며칠 후 시든 장미꽃을 보고 '벌써 장미꽃이 지는군'하고 탄식하자 '나는 그래도 만개했었어!'라고 다시 비웃는다.

 

 


 

 

함민복 시인 / 하늘을 나는 아라비아 숫자

 

 

계좌번호 012-24-0460-782

비밀번호 3322

호출번호 96

대기인원 12

자본주의의 심장 은행을 나와

한일병원을 향한다

3호선을 타고 가다 <423>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413> 쌍문동에 하차한다

한일병원 접수번호 300

대기인원 112

차트번호 88871

간이계산서 공급처 210-82-03667

약지급번호 349

티브이 채널 4 유선방송을 보다

전화번호 299-0446에 전화 걸다

약을 지급 받고

택시 서울 1바 4320을 타고

지하철로 돌아온다

삐삐삐......

하늘을 날아온 아라비아 숫자가

청바지 입은 여자의 허리춤에서 울고

핸드폰으로 날려보내는 아라비아 숫자들

공중에서 부글거리는 숫자들

대통령도 기호로 뽑는 시대

법조항이 세상을 다스리고

숫자로 숫자가 세상을 통치한다

숫자에 주눅이 들어 담배를 물면

88 EIGHT EIGHT 바코드 88003559

숫자 하나만 틀렸어도 일과가 어긋났을

국제질병번호 300인 사내는

숫자들 간의 인연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숫자에서 해방되기 위해 잠자리에 든

사내의 밤을 지키는 붉은 불빛

전기장판번호

3.

 

시집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함민복 시인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월성 원자력 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 2학년 때인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90년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을 펴냄. 1993년 <자본주의의 약속> 발표. 2011 제비꽃 서민시인상 수상 외 오늘의 예술가상 수상. 제 24회 김수영 문학상. 제7회 박용래문학상. 제2회 애지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