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희 시인 / 수도사를 위한 책
태어나서 지금까지 연애에 바친 시간
그 시간 동안 책을 썼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백과 사전을 썼으리라
그 사전 속 열병이라든가 집착이라든가 실연이라든가 낙태라는 말 그런 말들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 사전은 두꺼워도 결코 무겁지 않았으리라
나 지금이라도 이 지지부진한 연애를 끊고 마약을 끊듯이 연애를 끊고 [수도사를 위한 책] 1, 2, 3을 쓰기 시작할까나
그러나 나 아직은 연애 중이고 연애에 대한 상념들과 연애 중이고 연애에 대한 상념들과 열애 중인 나와 열애 중이라 책을 쓸 길 요원하다네 수도사의 책을 쓸 길 요원하다네
한명희 시인 / 어떤 등산
밤늦게 전화가 왔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우니 산에 가자고 했다
이 전화가 어디까지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왔는지 이 전화가 얼마를 헤매다니다 여기까지 왔는지 나는 직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밥을 싸서 소풍을 갔다 보온병에 커피도 담았다
가을산은 깊고 낮았다
나는 적당한 때에 웃었고 적당한 때에 눈을 맞췄다 그리고 대부분은 침묵했다
산은 나한테는 별로 맞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예감했다 언젠가 또 불현듯 전화가 오리라는 것 그때 또 서둘러 김밥을 싸리라는 것
한명희 시인 / 가장 무서운 것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무섭다 (가령, 개미보다는 송충이 같은 것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부드러운 것은 더 무섭다 (뱀의 경우가 그렇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부드러우면서 형체가 없는 것은 더욱 무섭다 (안개, 특히 밤안개…
형체가 없으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는 것 그런 것들은 모두 무섭다.
천천히 부드럽게 말하는 얼굴 그러면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그런 얼굴은 무섭다 정말 무섭다
* 시집,『두 번 쓸쓸한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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