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임 시인 / 안개
아무래도 잘못 든 길이다 정신을 가다듬겠다고 안경을 닦아서도 안 된다 짐작이지만 외길 성급히 돌아가는 낭떠러지쯤이지 싶다 나는 아직 작별의 말들을 남기지 않았다 일정 속도로 진행하는 기차 사실은 도깨비도로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무도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들도 없다 군데군데 마을의 나지막한 지붕들은 또 아침 하늘을 나는 새들은 어디에 있는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은 어둠만이 갖는 줄 알았다 빛으로 호명되지 못하는 것 가장 불행한 말이 어둠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 서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검정이 품고 있는 환한 빛 고양이 숨소리를 내는 옆 좌석 할머니의 눈가에 묻어나는 세상 수없이 거쳐왔을 어둠들이 환하다 저렇듯 검은 얼굴로도 평온한 할머니의 잠이라니 이곳에서는 모두 안개가 아니면 검은 물체들뿐이다 대가리부터 급류를 타는 뱀과 같이 기차는 제 몸조차 보이다 말다 한다 변함없을 저편의 강 들 산을 기억한다 나는 안에서 밖으로만 향한 사시의 눈을 가졌던가 엇나간 시선을 좇다 빠진 안개의 나라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광활한 공중의 나라 기차는 철로도 없이 급경사 낭떠러지를 타고 돌며 날고 있다 조심스럽게 닦는 차창 안으로 하나 둘 깊숙이 들어오는 저 환한 세상
<시와반시> 2004년 봄호
최광임 시인 / 밤꽃, 둥근 슬픔을 매달다
이맘 때 나는 암컷이었다 둥그런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다, 고약한 냄새에 허둥거리며 밥수저 놓을 자리에 헛구역질 한 그릇 놓는다 수컷의 본능만으로 암컷들의 꽁무니를 쫓아 달려오던 짐승 그런 밤, 동산 넘어 도시의 네온싸인들 붉은 입들은 지칠줄 모르고 오물거렸다 누가 누구를 먹은 것인지 새벽녘 핏기 가신 이빨로 드러눕는 세상 바람은 자꾸 코를 틀어막곤 했다 상처 탓이었다 내 안에서 영글지 못하고 실족해버린 풋밤들의 누렇게 들뜬 머리칼로 자라 칭칭 동여매던 허기 나 자신조차 가시가 되어 살았다, 지금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은, 짐승처럼 한 시절 견뎌 온 몸을 세우는 냄새다 나는 암컷이 아니라 꽃이었다 둥근 식탁에 행주질을 하다가 꽃 지는 밤에서야 안다, 나는 종내 밤栗일 것이었다
<제3의 문학> 200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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