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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연 시인 / 권진규의 장례식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8.

허연 시인 / 권진규의 장례식

 

 

 비가 내렸습니다

 

 권진규 씨는 허름한 옹이 박힌 관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시들지 않을 것 같은 꽃은 모짜르트가 들고 왔습니다. 잉크가 번져 얼룩진 리본엔 <내 정신이 너의 가슴에>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여섯 명의 조객 중엔 천재도 범인도 바보도 있었습니다. 하관이 끝나고 빗줄기가 굵어지자 붉은 황톳물이 그들의 발을 적셨고 갑자기 모짜르트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허연 시인 /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다가스카르 항구에선

이해하지 못했던 노래가 가슴을 치고

사랑 하나, 서서히 별똥으로 떨어진다

 

나는 투항했던가

감당 안 되는 빗물이 길을 막아버린 오늘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투항했는가

 

젖은 그물에 엉켜 죽어가는 펠리컨을 보며

비틀스의 해산을 떠올렸다

 

항구에서의 세월

나의 마다가스카르에선 세월과 친해질 수 없다

 

오늘 또

뼈만 남은 노인이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들짐승처럼 소리 없이 등 뒤를 지나갔다

 

마다가스카르의 어느 날

세월 같은 게 하나 지나갔다

 

 


 

 

허연 시인 / 휴면기

 

 

오랫동안 시 앞에 가지 못했다. 예전만큼 사랑은 아프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비굴할 만큼 비굴해졌고, 오만할 만큼 오만해졌다.

 

세상은 참 시보다 허술했다. 시를 썼던 밤의 그 고독에 비하면 세상은 장난이었다. 인간이 가는 길들은 왜 그렇게 다 뻔한 것인지. 세상은 늘 한심했다.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염소 새끼처럼 같은 노래를 오래 부르지 않기 위해 나는 시를 떠났고, 그 노래가 이제 그리워 다시 시를 쓴다. 이제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나 다행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시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며 시 앞에 섰다.

 

 


 

 

허연 시인 / 내가 원하는 천사

 

 

천사를 본 사람들은

먼저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살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놓았을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허연 시인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가 있음.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 한국출판학술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