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임경림 시인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4.

임경림 시인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 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먹이고 있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임경림 시인 / 문

 

 

오래 닫아만 둔다면

그건 문이 아니야

벽이지

 

열기 위해

잠시 닫아 두는 게 문이야

벌서는 아이처럼

너무 오래

나를 세워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본래 하나였던 세상

나로 인해 나우워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안과 밖이

강물처럼 만나

서로 껴안을 수 있게

마음과 마음이

햇살되어

따뜻이 녹여줄 수 있게

이제 그만

나를 활짝열어 주었으면 좋겠어

 

 


 

 

임경림 시인 / 바다가 루비 속으로

 

 

매물도를 다녀온 밤,

사막이 내 안에 출렁거렸어

내 안의 죽은 엄마들이 지느러미

펼치며 마중 나왔어 엄마의 늙은

머리카락 사이로 애기사막들이

불가사리 같은 손을 무수히 내저었어

두 다리 쭉 뻗고 고래처럼

가끔 울기도 하나 봐, 헝클어진

사막의 비명소리, 내 귀에

호스를 마구 꽂을 때마다

소금꽃, 자지러지게 피어났어

나는 고요한 섬 찾아, 엄마의 몸을

열고 너울너울 잠수해, 들어갔어

비단길 한 겹 한 겹 벗겨내자

구멍 숭숭 뚫린 막고굴, 태반 속에서

조우관 쓴 사내 하나 달처럼

걸어나왔어 나는 사내의 손을 잡고

입 맞추며 잠든 조가비를 흔들었어

 

태초의 어린 눈망울들, 파란 포도송이가

부풀어 올랐어 엄마의 넝쿨손을

따먹으며 온종일 뒹굴었어 줄어들지

않는 엄마, 기차멀미가 났어

포도주를 마신, 사막이 내 혈관

속으로 곤두박질 쳤어 부서진 사막의

뼈로 사내가 루비를 깎아 내 발에

신겨주었어 발목에 감긴 탯줄 속으로

바다가 숨어들었어 지금, 내 안에

사막이 자라나고 있어

 

 


 

 

임경림 시인 / 마두금

 

 

 첫 산고로 낳은 핏덩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어미 소, 배곯은 새끼 비적비적 다가서면 뒷발로 차 던지며 날뛰는 어미 소, 어르고 달래다 못한 주인 부탁을 받고 찾아온 한 중년의 남자가 어미 소 옆에서 마두금을 켰다 메마른 몽고초원의 낮고 낮은 끝에서 불어오는 시원(始原)의 바람소리 같은 마두금 가락, 송아지 울음소리를 빼닮았다는 그 가락 그 울음 끊어질 듯 휘어졌다 다시 이어질 때, 그 때서야 목청도 안 트인 제 새끼 울음소리 알아차린 어미, 어찌할 도리 없이 어미가 된 어미 소, 퉁방울 같은 그 눈자위 눈 녹듯이 녹고, 치켜 뜬 두 뿔 맥없이 꺾이더니 이윽고 축 쳐진 사타구니 비집고 들어온 새끼에게 젖을 빨렸다 축축한 혓바닥으로 어린것의 등에 엉키고 말라붙은 핏물을 핥아내었다 하염, 하염없이 핥아내었다

 

 


 

 

임경림 시인 / 골목길

 

 

 봄 햇빛 가려진 시멘트 담벼락 아래 길의 배꼽처럼 바닥에 들러붙은 감꼭지, 금방 싹 틔울 것처럼 까만 씨앗으로 박힌 죽은 거미, 씹다 버린 이를 오래 기억하려는 듯 이빨 자국 선명한 껌딱지, 바닥과 담벼락이 만난 조그만 틈 사이에 다시 필 것처럼 시들은 제비꽃, 저것들 죄 다 끌어모아 봉분을 만들었으면......, 함께 썩어갈 흙 한 줌 없는 이 외로움의 길목에서 무덤이 없는 것들은 저들끼리 모여 무덤을 만든다 조그만 바람에도 서로 어깨를 디밀었다 당기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낯익은 등이 된다

 

 


 

임경림 시인

1961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 대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