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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림 시인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 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먹이고 있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임경림 시인 / 문
오래 닫아만 둔다면 그건 문이 아니야 벽이지
열기 위해 잠시 닫아 두는 게 문이야 벌서는 아이처럼 너무 오래 나를 세워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본래 하나였던 세상 나로 인해 나우워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안과 밖이 강물처럼 만나 서로 껴안을 수 있게 마음과 마음이 햇살되어 따뜻이 녹여줄 수 있게 이제 그만 나를 활짝열어 주었으면 좋겠어
임경림 시인 / 바다가 루비 속으로
매물도를 다녀온 밤, 사막이 내 안에 출렁거렸어 내 안의 죽은 엄마들이 지느러미 펼치며 마중 나왔어 엄마의 늙은 머리카락 사이로 애기사막들이 불가사리 같은 손을 무수히 내저었어 두 다리 쭉 뻗고 고래처럼 가끔 울기도 하나 봐, 헝클어진 사막의 비명소리, 내 귀에 호스를 마구 꽂을 때마다 소금꽃, 자지러지게 피어났어 나는 고요한 섬 찾아, 엄마의 몸을 열고 너울너울 잠수해, 들어갔어 비단길 한 겹 한 겹 벗겨내자 구멍 숭숭 뚫린 막고굴, 태반 속에서 조우관 쓴 사내 하나 달처럼 걸어나왔어 나는 사내의 손을 잡고 입 맞추며 잠든 조가비를 흔들었어
태초의 어린 눈망울들, 파란 포도송이가 부풀어 올랐어 엄마의 넝쿨손을 따먹으며 온종일 뒹굴었어 줄어들지 않는 엄마, 기차멀미가 났어 포도주를 마신, 사막이 내 혈관 속으로 곤두박질 쳤어 부서진 사막의 뼈로 사내가 루비를 깎아 내 발에 신겨주었어 발목에 감긴 탯줄 속으로 바다가 숨어들었어 지금, 내 안에 사막이 자라나고 있어
임경림 시인 / 마두금
첫 산고로 낳은 핏덩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어미 소, 배곯은 새끼 비적비적 다가서면 뒷발로 차 던지며 날뛰는 어미 소, 어르고 달래다 못한 주인 부탁을 받고 찾아온 한 중년의 남자가 어미 소 옆에서 마두금을 켰다 메마른 몽고초원의 낮고 낮은 끝에서 불어오는 시원(始原)의 바람소리 같은 마두금 가락, 송아지 울음소리를 빼닮았다는 그 가락 그 울음 끊어질 듯 휘어졌다 다시 이어질 때, 그 때서야 목청도 안 트인 제 새끼 울음소리 알아차린 어미, 어찌할 도리 없이 어미가 된 어미 소, 퉁방울 같은 그 눈자위 눈 녹듯이 녹고, 치켜 뜬 두 뿔 맥없이 꺾이더니 이윽고 축 쳐진 사타구니 비집고 들어온 새끼에게 젖을 빨렸다 축축한 혓바닥으로 어린것의 등에 엉키고 말라붙은 핏물을 핥아내었다 하염, 하염없이 핥아내었다
임경림 시인 / 골목길
봄 햇빛 가려진 시멘트 담벼락 아래 길의 배꼽처럼 바닥에 들러붙은 감꼭지, 금방 싹 틔울 것처럼 까만 씨앗으로 박힌 죽은 거미, 씹다 버린 이를 오래 기억하려는 듯 이빨 자국 선명한 껌딱지, 바닥과 담벼락이 만난 조그만 틈 사이에 다시 필 것처럼 시들은 제비꽃, 저것들 죄 다 끌어모아 봉분을 만들었으면......, 함께 썩어갈 흙 한 줌 없는 이 외로움의 길목에서 무덤이 없는 것들은 저들끼리 모여 무덤을 만든다 조그만 바람에도 서로 어깨를 디밀었다 당기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낯익은 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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