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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시인 / 상처
1 버스가 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옆에 선 사내가 근육을 긴장시키며 손잡이를 움켜쥔다. 사내의 팔뚝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보인다. 둥글고 큼직하게 주위 살들을 잡아당기며 아문 흉터가 세 개 일렬로 박혀 있다. 언제였던가, 나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많이 먹고 친구들 앞에서 고통을 참으며 독하게 지졌었다. 상처는 많이 부풀어올랐다. 며칠 동안 팔 전체가 화끈거렸고, 화끈거렸지만 아무 흉터도 남지 않았다.
햇살 내리네 저 햇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따사로운 햇살
사내는 아마 물집이 생긴 자리를 세 번 이상 더 지졌을 것이다. 아무도 근접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기억을 훈장처럼 팔뚝에 새겨넣기 위하여 사내는 아까처럼 팔뚝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젖은 숫돌처럼.
2 지나간 일들은 정말로 지나가버린다, 그날에나 지금에나 햇살 저 햇살,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만 있다. 그런 식의 무례한 작별인사는 그를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들꽃에게라도 말 걸고 싶은 발걸음. 얘 너도 집이니? 아니 나는 城이야.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 기억만 고대인류의 꼬리뼈처럼 진화의 문턱에서 흔들거릴 뿐.
전대호 시인 / 손가락
1 우리 아주 먼 곳을 가리킬 때 아주 아주 멀어서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서 우리 다만 방향만으로 서로를 믿어야 할 때 빛나는 손가락들 비로소 한 방향이 되어, 이름 없이 빛나는 손가락들
2 가장 먼 곳을 언급하지 않고, 가장 먼 곳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가? 길이 집을 대신할 수도 있는가? 질문만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는가 질문만으로
3 내가 질문을 살아갈 때, 까짓거 외로움쯤은 견디겠어 충실히 기다리는 자는 적어도 권태는 이길거야 굳게 마음먹고 오뚝이처럼 살아갈 때 때로 반성하는 내 눈에 허공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이 독재자의 제스츄어처럼 가식정이어 보이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거야 까짓 거 외로움쯤은 견디겠지 그래 권태도 내 적은 아닐거야 하지만, 어차피 허공을 가리킬 뿐인 걸 잘 아는 내 손가락이 내가 우스워요 이젠 내려갈래요 하면, 무슨 말로 그를 다시 부추길래? 나는 질문을 살 수 있을까? 외계와의 연락은 점점 뜸해지고 아이도 낳았는데, 그래도 계속 즐겁게 즐겁게 질문을 살 수 있을까?
전대호 시인 / 별똥별
별똥별이 천구에 한 십오 도쯤 원호를 긋고 사라진다 이렇게 멀리 있어 내 귀와 눈은 느끼지 못했지만 아주 높은 곳에서는 장엄했으리라, 공기를 찢는 그의 속도가 쏟아 놓는 소리 불타 오르는 그의 몸뚱이가 내뿜는 빛 그 장엄함 앞에 거미줄처럼 어둠 속으로 길게 어어져 있던 그의 이탈의 궤적도 일순간에 불타 없어졌으리라 모든 별들 침묵했으리라 그리고 그가 보여 준 마지막 궤적을 이어 나는 이렇게 적어야겠다: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
전대호 시인 / 멍텅구리배
그러나 생의 더 많은 부분은 단지 버티는 일로 채워진다 슬픔이라도 우리를 사로잡아 폭풍 속의 시간을 맛보는 날은 정녕 얼마나 드문가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의 부인할 수 없는 무게 살아 있음은 대개 죽음의 부정일 뿐이다
전대호 시인 / 눈꽃의 꽃말
1 결정은 모두 핵을 중심으로 자라나는데 그 핵은 대개 불순물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삼켜선 안 되고 삼킬 수도 없는 돌뗑이를 깨물고 돌뗑이처럼 버텨야 하는 거다 거기서 가장 완결된 형태가 나온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2 대청봉 정상에서 눈꽃을 보았다 바람 때문에 땅엔 단 한 톨의 눈도 없는데 나무들은 수천의 흰 창을 뽑아 든 모습이었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이 꾸는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직선적이고 살기등등했다. 난 돌아와 벗에게 얘기했다
씨앗이 있었던 게야 수 개월 전 천칠백 미터 아래로 퇴각하는 무리로부터 버림받고 남아 표면을 뚫고 나갈 때 아닌 야망만 키우다가 굳어 껍질이 된 씨앗이 있었던 게야 대청봉을 덮은 눈꽃은 수의(壽衣)야 분분히 날리는 눈송이가 죽은 씨앗을 깨물고 뒤이어 또 다른 눈송이가 그들 모두를 깨물고 그렇게 꽃의 형상을 만들어 가지'
너무 심한 상상이라고 일축해 버렸지만 눈꽃이 보여 주는 게 예사로운 퇴적이 아니라는 것엔 나도 동의한다. 지독한 기억이나, 너무 단단한 열망이 퇴적에 앞서 이미 있었기 전엔 그런 형상이 나올 수가 없지 않은가
전대호 시인 / 성찰
나 또한 자유와 경쟁과 개성과 계약과 다수결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이 시대를 연민한다 이 시대는 내게 무엇보다도 먼저 의심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가로등 오랫동안 찾아 헤맨 아름다움은 어쩌면 저토록 초라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노란 가로등 불빛을 덮고 깊이 잠든 사내 모로 흘러내리는 침
전대호 시인 / 등나무
지옥과 천당 사이 그대 또 한번 몸 비틀고, (알겠네 알겠어) 지금은 봄.
난처한 아주 난처한 일 집나갔던 딸이 애길 안고 돌아오고 주름진 팔십 노파 족보에도 없는 임신 우아, 너 정말 이런 꽃 피워도 되는 거니? 벌써 몇번째니, 알 만큼 아는 니가.
지옥과 천당 사이
그대 살아온 날들 또 한번 비틀 준비 낙엽지고 낙엽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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