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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대호 시인 / 상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4.

전대호 시인 / 상처

 

 

1

 버스가 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옆에 선 사내가 근육을 긴장시키며 손잡이를 움켜쥔다. 사내의 팔뚝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보인다. 둥글고 큼직하게 주위 살들을 잡아당기며 아문 흉터가 세 개 일렬로 박혀 있다. 언제였던가, 나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많이 먹고 친구들 앞에서 고통을 참으며 독하게 지졌었다. 상처는 많이 부풀어올랐다. 며칠 동안 팔 전체가 화끈거렸고, 화끈거렸지만 아무 흉터도 남지 않았다.

 

 햇살 내리네 저 햇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따사로운 햇살

 

 사내는 아마 물집이 생긴 자리를 세 번 이상 더 지졌을 것이다. 아무도 근접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기억을 훈장처럼 팔뚝에 새겨넣기 위하여 사내는 아까처럼 팔뚝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젖은 숫돌처럼.

 

2

 지나간 일들은 정말로 지나가버린다, 그날에나 지금에나 햇살 저 햇살,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만 있다. 그런 식의 무례한 작별인사는 그를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들꽃에게라도 말 걸고 싶은 발걸음. 얘 너도 집이니? 아니 나는 城이야.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 기억만 고대인류의 꼬리뼈처럼 진화의 문턱에서 흔들거릴 뿐.

 

 


 

 

전대호 시인 / 손가락

 

 

1

우리 아주 먼 곳을 가리킬 때

아주 아주 멀어서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서

우리 다만 방향만으로 서로를 믿어야 할 때

빛나는 손가락들

비로소 한 방향이 되어, 이름 없이

빛나는 손가락들

 

2

가장 먼 곳을 언급하지 않고,

가장 먼 곳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가?

길이 집을 대신할 수도 있는가?

질문만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는가

질문만으로

 

3

내가 질문을 살아갈 때,

까짓거 외로움쯤은 견디겠어

충실히 기다리는 자는 적어도 권태는 이길거야

굳게 마음먹고 오뚝이처럼 살아갈 때

때로 반성하는 내 눈에

허공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이

독재자의 제스츄어처럼 가식정이어 보이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거야

까짓 거 외로움쯤은 견디겠지

그래 권태도 내 적은 아닐거야

하지만, 어차피 허공을 가리킬 뿐인 걸 잘 아는 내 손가락이

내가 우스워요 이젠 내려갈래요

하면, 무슨 말로 그를 다시 부추길래?

나는 질문을 살 수 있을까?

외계와의 연락은 점점 뜸해지고

아이도 낳았는데, 그래도 계속 즐겁게

즐겁게 질문을 살 수 있을까?

 

 


 

 

전대호 시인 / 별똥별

 

 

별똥별이 천구에

한 십오 도쯤 원호를 긋고 사라진다

이렇게 멀리 있어

내 귀와 눈은 느끼지 못했지만

아주 높은 곳에서는 장엄했으리라,

공기를 찢는 그의 속도가 쏟아 놓는 소리

불타 오르는 그의 몸뚱이가 내뿜는 빛

그 장엄함 앞에

거미줄처럼 어둠 속으로 길게 어어져 있던

그의 이탈의 궤적도

일순간에 불타 없어졌으리라

모든 별들 침묵했으리라

그리고 그가 보여 준 마지막 궤적을 이어

나는 이렇게 적어야겠다:

방금 그가 별들의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고.

 

 


 

 

전대호 시인 / 멍텅구리배

 

 

그러나 생의 더 많은 부분은

단지 버티는 일로 채워진다

슬픔이라도 우리를 사로잡아

폭풍 속의 시간을 맛보는 날은

정녕 얼마나 드문가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의

부인할 수 없는 무게

살아 있음은 대개

죽음의 부정일 뿐이다

 

 


 

 

전대호 시인 / 눈꽃의 꽃말

 

 

1

결정은 모두 핵을 중심으로 자라나는데

그 핵은 대개 불순물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삼켜선 안 되고 삼킬 수도 없는

돌뗑이를 깨물고

돌뗑이처럼 버텨야 하는 거다

거기서 가장 완결된 형태가 나온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2

대청봉 정상에서 눈꽃을 보았다

바람 때문에 땅엔 단 한 톨의 눈도 없는데

나무들은 수천의 흰 창을 뽑아 든 모습이었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이 꾸는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직선적이고 살기등등했다.

난 돌아와 벗에게 얘기했다

 

씨앗이 있었던 게야

수 개월 전

천칠백 미터 아래로

퇴각하는 무리로부터 버림받고 남아

표면을 뚫고 나갈 때 아닌 야망만 키우다가

굳어 껍질이 된 씨앗이 있었던 게야

대청봉을 덮은 눈꽃은 수의(壽衣)야

분분히 날리는 눈송이가 죽은 씨앗을 깨물고

뒤이어 또 다른 눈송이가 그들 모두를 깨물고

그렇게 꽃의 형상을 만들어 가지'

 

너무 심한 상상이라고 일축해 버렸지만

눈꽃이 보여 주는 게 예사로운 퇴적이 아니라는 것엔

나도 동의한다.

지독한 기억이나,

너무 단단한 열망이

퇴적에 앞서 이미 있었기 전엔

그런 형상이 나올 수가 없지 않은가

 

 


 

 

전대호 시인 / 성찰

 

 

나 또한

자유와 경쟁과 개성과

계약과 다수결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이 시대를 연민한다

이 시대는 내게 무엇보다도 먼저

의심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가로등

오랫동안 찾아 헤맨

아름다움은 어쩌면

저토록 초라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노란 가로등 불빛을 덮고

깊이 잠든 사내

모로 흘러내리는 침

 

 


 

 

전대호 시인 / 등나무

 

 

지옥과 천당 사이

그대 또 한번 몸 비틀고,

(알겠네 알겠어)

지금은 봄.

 

난처한 아주 난처한 일

집나갔던 딸이 애길 안고 돌아오고

주름진 팔십 노파 족보에도 없는 임신

우아, 너 정말 이런 꽃 피워도 되는 거니?

벌써 몇번째니, 알 만큼 아는 니가.

 

지옥과 천당 사이

 

그대 살아온 날들

또 한번 비틀 준비

낙엽지고 낙엽지고

 

 


 

전대호 시인.번역가

1969년 경기도 수원 출생.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철학과 석사 졸업. DAAD장학생으로 독일 쾰른에서 철학 전공.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으로 등단.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 <성찰>. 저서 <철학은 뿔이다>. 번역서 다수. 1996년 대산재단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