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석 시인 /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깡통을 위하여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나는 살아 있다. 거리를 힘차게 굴러다니며 토해 놓는 만큼의 세상 공기를 마시고 살아간다. 줄어드는 뼛속으로 오염된 언어들이 넘나들지만, 결코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문율. 내 목소리는 나팔소리보다 요란하고 아이의 싱싱한 울음보다 선명하다. 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춥고 윙윙거리는 냉장고 속에 잘 진열된다.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때론 상한 냄새에 진저리치며 심한 두통을 앓기도 한다. 어느 한 순간, 문이 열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나를 감싸 쥔다. 나는 선택된 기쁨으로 고통을 기다린다. 그는 내 모자를 딱, 하고 천천히 벗긴 후 내 살을 자기의 살 속으로 들어붓는다. 눈물 같은 거품을 게워내며 내 살은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어떤 힘에 의하여 신나게 공중을 날아간다. 나는 다시 찌그러지는 연습을 시도한다.
199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조영석 시인 / 토이 크레인
사내는 소주의 목뼈를 움켜쥐고 있었다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 몇 닢을 얼어터진 손바닥 위에 펼쳐보았다 녹슨 입술을 굳게 다문 구멍가게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앉은뱅이 크레인 앞에서 사내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눈꺼풀 없는 인형들이 크레인의 뱃속에서 불면의 눈알들을 치뜨고 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거스름의 날들 사내는 단 한 번도 등 푸른 지폐였던 시절이 없었다 동전 속에 입김을 불어넣고 크레인의 몸속으로 몸소 들어가는 사내 허공을 향해 허깨비를 잡으려 손을 허우적거렸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것이 어디 쓸모없는 것들뿐이겠는가 사내는 크레인 몸속으로 들어가 푹신한 인형들 속에서 잠이 들었다 크레인의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목뼈가 부러진 소주 한 병이 조용히 맑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조영석 시인 / 세계의 날씨
새벽 두시 극동 아시아의 남쪽 그 남쪽의 북쪽에 위치한 나의 거처 몇 개의 못이 별자리처럼 박힌 허름한 벽에 지구의 날씨가 떠오른다 리우데자네이루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색과 시드니의 파도 높이가 무표정한 색깔의 음악으로 내 거처에 울려퍼진다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결코 가볼 수도 없을 희망봉 케이프타운의 오전은 화창할 것이지만 뉴델리의 최저기온과 최고기온은 어떤 전생의 연(緣)으로 이 밤 내 불면의 강 위로 흐르는 것일까 라면봉지와 남미의 맥주병이 뒹구는 앉은뱅이책상 시집들의 무덤 너머로 나는 실제 없을지도 모를 런던과 파리의 풍속을 온몸으로 듣는다 증언과 사진만 난무하는 허구의 세계 속에서 날씨와 살을 섞는 나의 불면 한 잔의 불안과 한 잔의 불행 한 병의 불멸을 마시며 다음 생으로의 출근을 기다리며 잠이 든다.
조영석 시인 / 가족사진
어머니 어깨 위에 아버지의 손이 놓여 있다 사진 속 가족들은 웃고 있다
얼어 있던 땅이 녹으면서 아버지가 꽁꽁 얼었다고 한다 소처럼 큰 눈만 끔벅였다고 누이와 어머니가 들기에는 소처럼 무거웠다고 아버지 몸만 주무르며 눈물만 흘렸다고 소리는 나오지 않더라고
고엽제 때문이지 중풍이 아니다 침대에 누워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진 월남 근처에도 가지 않으셨어요 고엽젠 어디에도 있단다 아버지의 어깨 위에 어머니의 손이 얹혀진다 너의 아버지는 국가유공자시다
그래도 살아서, 이만큼 걸어다니는 건 기적이다 어머니! 기적은 10년째 그대로예요
기적이 벌어지는 동안 누이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긴 병에는 효자가 없어 오빠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고 싶구나 어머니, 우리집에 들어오는 건 뭐든 병이 들어요, 봐라 그래도 난 아직 끄떡없단다
네 어머니 어깨를 누르고 있는 내 손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아버지가 가족사진을 다시 찍자고 말했다
식탁엔 거미줄이 쳐져 있다 이 집엔 바퀴벌레도 살지 못한다 사진 속 웃음에 녹이 슬어 있다.
조영석 시인 / 보이저 2
내 이름은 항해자 방향을 잃어버린 백치 항해자 애초의 힘보다 더 센 힘이 작용하지 않아 맛도 냄새도 없는 바람을 타고 세계의 벽을 향해 날아갈 수밖엔 없지만 내가 전하는 말을 들어줘요
수십억 광년 만에 만난 당신 내 말의 주인은 이미 예전 그들이 아닐 거예요 까마득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들은 아마 다른 종(種)이 되어 있거나 이 세계에서 사라졌겠죠
상상이 가나요 당신은 주인 없는 말을 듣고 있는 거예요 당신들이 극적으로 낚아올린 존재가 이젠 우주 저편 어딘가에 없을 테지만 쓸쓸해 말아요
난 시간을 잊는 대신 침묵 속을 헤엄치는 법을 배웠죠 내가 날아온 방향으로 렌즈를 고정시키고 셔터를 눌러봐요 진화의 끝에 있는 당신들 눈엔 아마 보일지도 몰라요
창백하다못해 투명한 검은 점을 그 속에서 그들이 살다 갔어요 기억해주면 좋겠지만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요
그들도 나만큼이나 백치였다는 사실을 안녕, 나를 멈춰준 당신들 고마워요.
조영석 시인 / 노량진 고시촌
조선왕조가 문을 닫은 지 백 년이지만 노량진에는 여전히 지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울 사람들의 텃세쯤은 사투리로 밟아두고 저마다 고향의 특산물이 아닌 특산물을 팔아치운 돈 몇 푼을 거머쥔 채 배 대신 기차를 통해 들어와 땅을 사서 뿌리를 박았다. 뜨내기 보부상처럼 봇짐 하나씩을 짊어지고 어디를 걸어도 골목뿐인 길을 돌아다녔다. 출신을 알 수 없는 어깨들과 부딪치며 온몸에 붙은 졸음을 쫓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면 고시원으로 들어가거나 식당 앞에 줄을 섰다. 처마 밑에 모여 시험에 대해 떠도는 소문들을 담배 한 갑으로 나누어 피웠다. 길바닥에는 단풍보다 화려한 전단지들이 뒹굴었다. 다달이 시험은 멈추지 않았고 한번 뿌리가 걸린 사람들은 쉽사리 노량진을 뜨지 못했다. 어느 누가 손에 잡힐 듯한 금의환향을 마다하겠는가. 한번 떠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웃음은 모두 증발해버린 비린내 대신 짠내만 가득한 동네 노량진 고시촌
조영석 시집『선명한 유령』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임경림 시인 /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외 4편 (0) | 2022.02.14 |
|---|---|
| 장용철 시인 / 안전거리 외 5편 (0) | 2022.02.14 |
| 전대호 시인 / 상처 외 6편 (0) | 2022.02.14 |
| 김지율 시인 / 빨간 컨테이너 (0) | 2022.02.14 |
| 최우서 시인 / 펜로즈 계단* 외 1편 (0) | 2022.02.1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