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윤준경 시인 / 시인의 연금(軟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3.

윤준경 시인 / 시인의 연금(軟禁)

 

 

 가수 Y군이 나타나려하자 수많은 카메라맨들이 취재경쟁을 벌이느라 공항은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고 바리케이트를 친 팬들 때문에 Y군은 도저히 발을 뗄 수 없는 상황,

 경호원에 이끌려 힘겹게 사람의 터널을 뚫고 나오지만 그의 발이 닿는 곳은 어디나 人山이다.

 

 뉴스의 초점에 한 시인이 서있다

 그분의 한마디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은 몸을 던져 싸움을 벌이고

 그분의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밤을 새며 기다린 수많은 팬과 문학도들,

 때문에 그의 작은 키는 人海에 묻혀 보이지 않고

 그의 옷은 하마터면 찢어질 뻔.

 마침내 그는 가택연금된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교통을 마비시킬 우려가 크므로 당신의 인기가 떨어질 때까지 외출을 삼가하시오'

(부질없는 상상이다.)

 

 


 

 

윤준경 시인 / 혜주야 사랑해

 

 

 지금 Y여고 앞 담벼락에 가보세요

"혜주야, 사랑해"라고 쓴 분홍색종이가 편지와 함께 지그재그로 수도 없이

붙어 있어요. 어떤 남학생의 치기어린 고백일까요. 혜주가 그걸 보고 웃을

까 울까. 아마 울진 몰라도 혜주는 좋겠지요? 만인이 다 보도록 사랑해라

고 외쳐주는 그 애가 있어서.......  만인이 다 보도록........

 

 나에게도 그런 추억 있던가? 눈이 길처럼 쌓인 어느 날, 돈암동 산번지

나를 못잊어 밤새 휘파람을 불던 그 사람, 아 그 사람 잠도 안자고 문밖에

서 밤을 새더니...... "사랑해" "사랑해" "네 생명 다 없어져도 사랑해" 라

더니.......ㅎㅎㅎ 그 사람 가버렸네. 나 아직 살아있는데 가버렸네. 다리

팔 다 성한데....... 눈도 밝은데...... 안보이네 그 사람.

 

 


 

 

윤준경 시인 / 시인의 칼

 

 

칼 가세요, 칼 가세요

 

나는 뜻한 바 있어

칼 가는 장인(匠人)이 되었네

녹슨 칼, 이 빠진 칼, 무디어진 칼

번쩍번쩍 날이 서도록

시원하게 칼을 가세요

 

앓다가 마는 병이 되지말고

가슴 속 비장( 秘藏)한 줄을 꺼내어

빛으로 닳아 없어지도록

칼을 가세요

 

그 칼로

음식을 만드세요

오래 먹을 맛 나는

영혼의 음식을

 

칼 가세요, 칼 가세요

썩어가는 영혼을 도려내세요

 

그러나

나도 시인이 되면

하나뿐인 목숨에 날을 세워

애꿎은 빈 도마만 치게 되겠지.

 

 


 

 

윤준경 시인 / 노끈

 

 

어둑한 사랑채에서 할아버지는 노끈을 꼬고 계셨다

잘 다녀오너라 하실 때에도 잘 다녀왔니 하실 때에도

긴 가래를 목으로 넘기시며 노끈을 꼬셨다

노끈은 길게 이어져 둥근 타래를 만들며

구부러진 시렁 위에서 아무의 눈길도 받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따금 아무짝에 쓸모 없는 짓이라고 투정을 하셨고

그런데 어느 날은 "노끈이나 꼬시구려" 하며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부추기셨다

나는 노끈 없는 할아버지를 상상할 수 없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노끈을 꼬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없고 노끈만 있었다.

 

 


 

 

윤준경 시인 / 조리원에서

 

 

당신 닮은 아기 하나 낳고 싶다

열달 무겁던 몸을 풀고

뜨신 아랫목에 허리를 지지며

팔팔 끓는 미역국에 혀를 데이고 싶다

 

꿈같이 노곤한 삼칠일

오직 아기에게 눈 맞추고

불어오르는 젖으로

아기를 재우는

살결 보드라운 엄마이고 싶다

 

당신 닮은 아기 하나

비바람 눈보라 다 막아

당신보다 더 용감하게

더 크게 키우겠노라

그 여린 귀에 속삭이는

젊고 당찬 엄마이고 싶다

 

 


 

 

윤준경 시인 / 밥

 

 

어머니는 밥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밥 먹었니?

밥 먹어라

더 먹어라

 

갖은 나물에 더운 국

뜨거운 밥 한 그릇 듬뿍

먹이시는 일 뿐

남자나 사랑 따위는

당초에 모르시는 분이었다

 

치매 걸려

세상일 다 잊으신 뒤에도

잊지 않으시던 말, 밥

밥 먹고 가라

 

언제부턴가 나도

밥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아들 딸 며느리 불러놓고

밥 먹어라할 때에

양양한 목소리

열사날에 한번쯤

목을대 빳빳이 일어서는

밥심

 

 


 

 

윤준경 시인 / 11월의 어머니

 

 

11월 들판에

빈 옥수숫대를 보면 나는

다가가 절하고 싶습니다

줄줄이 업어 기른 자식들 다 떠나고

속이 허한 어머니

 

큰애야, 고르게 돋아난 이빨로

어디 가서 차진 양식이 되었느냐

작은애야, 부실한 몸으로

누구의 기분 좋은 튀밥이 되었느냐

둘째야, 넌 단단히 익어서

가문의 대를 이을 씨앗이 되었느냐

 

11월의 바람을 몸으로 끌어안고

들판을 지키는 옥수숫대

 

날마다 부뚜막에 밥 한 그릇 떠놓으시고

뚜껑에 맺힌 눈물로

집 나간 아들 소식을 들으시며

죽어도 예서 죽는다 뿌리에 힘을 주는

11월 들판의 강한 어머니들에게

나는 오늘도 절하고 돌아옵니다

 

 


 

윤준경 시인

경기도 양주 출생. 서라벌예대 방송과 졸업. 서울방송통신대 교육학과 졸업. 1994년『한맥문학』신인상 수상. 우이동시낭송회 회원. 한국시인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회원. 한국가곡작사가협회회원. 시집 <나 그래도 꽤 괜찮은 여잡니다> <1999년 우이동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