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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임수 시인 / 물방울과 같이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기를 넓은 잎새 위를 또르륵 굴러 수직으로 승천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냐 한 생 가득 담은 눈빛을 선뜻 버리고 저토록 투명하게 참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한바탕 몸을 날려 떠날 수 있음이 또 얼마나 가슴 시린 뜨거움이냐 하지만,
저 작은 물방울에도 끝에 와서는 어찌 잠시의 망설임이 없었겠느냐 어쩌면 손을 놓지 않기 위해 끝내 발버둥쳤을지도 모르고 움츠려 몸을 말아들인 채 부들부들 떨었을지도 모르는 것 그러니 또 다른 물방울로 한 세상 흘러내리는 내 어찌 안쓰러운 눈빛 하나 가득 담아주지 못하겠느냐
<젊은시> 동인 8집에서
윤임수 시인 / 복사꽃 그늘에 앉아서
복사꽃 그늘에 앉아서 내가 즐거운 것은 그늘진 한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은 오래된 나무가 맑은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네 오래되어 단단한 나무가 정성껏 온 힘을 끌어올려 내 눈길 으스러 지도록 더 맑은 꽃잎을 피워내고 있기 때문이네 그러고도 아무렇게나 살살거리며 허리를 비틀어대지 않기 때문이네
<젊은시> 동인 제 8집에서
윤임수 시인 / 불편함의 힘
아주 오래전 이야기인데 정규 모임이 끝나고도 끈질기게 남은 몇몇의 시간은 질질질 흘러 마침내 한밤이 되고야 말았는데 가난뱅이 보일러공 시인은 한사코 택시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라고 기다렸다가 첫 버스를 타면 된다고 편리함에 몸을 맡기면 끝장이라고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가끔 일이 있어 한밤을 걸을 때면 문득 그때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가슴에 안고 걷고 또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불편함의 힘을 온몸으로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말입니다.
윤임수 시인 / 폐지 줍는 노인
삶의 터전이었던 굽은 골목을 고스란히 허리에 담고 있는 저 노인
폐지 가득 낡은 유모차에 기대어 오래 숨을 고르고 있는 저 노인
수없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지금도 저렇게 멈추어 있는 것일까
팔십 년의 지난한 세월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윤임수 시인 / 꼬치 아파
혀 짧은 발음의 그는 가끔 미간을 찡그리며 아후 꼬치 아파, 하는데 대체 골치가 아픈 것일까 꼬치가 아픈 것일까
오늘 아침 장대비에 맥을 놓은 백일홍을 보며 또 아후 꼬치 아파, 하는데 백일홍은 골치도 없고 꼬치도 없으니 분명 꽃이 아픈 게 맞으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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