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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임수 시인 / 물방울과 같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3.

윤임수 시인 / 물방울과 같이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기를

넓은 잎새 위를 또르륵 굴러

수직으로 승천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이냐

한 생 가득 담은 눈빛을 선뜻 버리고

저토록 투명하게

참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한바탕 몸을 날려 떠날 수 있음이

또 얼마나 가슴 시린 뜨거움이냐

하지만,

 

저 작은 물방울에도 끝에 와서는

어찌 잠시의 망설임이 없었겠느냐

어쩌면 손을 놓지 않기 위해

끝내 발버둥쳤을지도 모르고

움츠려 몸을 말아들인 채

부들부들 떨었을지도 모르는 것

그러니 또 다른 물방울로 한 세상 흘러내리는

내 어찌 안쓰러운 눈빛 하나

가득 담아주지 못하겠느냐

 

<젊은시> 동인 8집에서

 

 


 

 

윤임수 시인 / 복사꽃 그늘에 앉아서

 

 

복사꽃 그늘에 앉아서

내가 즐거운 것은

그늘진 한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은

오래된 나무가

맑은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네

오래되어 단단한 나무가

정성껏 온 힘을 끌어올려

내 눈길 으스러 지도록

더 맑은 꽃잎을 피워내고 있기 때문이네

그러고도 아무렇게나 살살거리며

허리를 비틀어대지 않기 때문이네

 

<젊은시> 동인 제 8집에서

 

 


 

 

윤임수 시인 / 불편함의 힘

 

 

아주 오래전 이야기인데

정규 모임이 끝나고도 끈질기게 남은

몇몇의 시간은 질질질 흘러

마침내 한밤이 되고야 말았는데

가난뱅이 보일러공 시인은

한사코 택시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라고

기다렸다가 첫 버스를 타면 된다고

편리함에 몸을 맡기면 끝장이라고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가끔 일이 있어 한밤을 걸을 때면

문득 그때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가슴에 안고

걷고 또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불편함의 힘을

온몸으로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말입니다.

 

 


 

 

윤임수 시인 / 폐지 줍는 노인

 

 

삶의 터전이었던 굽은 골목을

고스란히 허리에 담고 있는 저 노인

 

폐지 가득 낡은 유모차에 기대어

오래 숨을 고르고 있는 저 노인

 

수없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지금도 저렇게 멈추어 있는 것일까

 

팔십 년의 지난한 세월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윤임수 시인 / 꼬치 아파

 

 

혀 짧은 발음의 그는

가끔 미간을 찡그리며

아후 꼬치 아파, 하는데

대체

골치가 아픈 것일까

꼬치가 아픈 것일까

 

오늘 아침

장대비에 맥을 놓은 백일홍을 보며 또

아후 꼬치 아파, 하는데

백일홍은 골치도 없고 꼬치도 없으니

분명

꽃이 아픈 게 맞으렷다.

 

 


 

윤임수 시인

1966년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졸업, 1998년 <실천문학> 시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시집으로 『상처의 집』 『절반의 길』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와 민족문학연구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한국철도공사에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