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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병근 시인 / 복사꽃 나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3.

유병근 시인 / 복사꽃 나무

 

 

기울어진 나무는 기울어진 쪽으로

 

해지는 소리를 보고 있다

이 꽃나무와 저 꽃나무 사이

기울어지는 그림자의 빛깔을 만지고 있다

기울어지다가

잠깐

지는 해의 틈새를 받치고 있다

기울어짐과 기울어짐의 각도에 대하여

절하다가 고개를 드는 이목구비/어슬한 얼굴 너머로 지는 해가 기울고 있다

제비는 오지 않고 복사꽃 붉은 봄이

기울어진 어깨를 쓰다듬고 있다

 

어쩌면 한갓지다

 

 


 

 

유병근 시인 / 역사복집

 

 

 역사의 현장이라고, 역사에 힘을 주는 그의 어깨 너머로 힘은 안 보이고 새로 도배를 한 듯한 희멀건 벽면이 나타났다 수저를 들다말고 더 정확하게는 복어 수육을 젓가락으로 집다말고 그랬다 안 보이는 힘은 젓가락에도 집히지 않았다 머리꼭지에서 형광등 불빛이 눈 휘번덕거리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현장재연처럼 주안상이 들어오고 나가고 주인집 마담의 스란치마 끄는 소리 들어오고 나가고 은밀히 귀에 대고 들어오고 나가고 안 보이던 힘도 어느 돌쩌귀 비집고 들어오고 나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도배 칼로 오려붙인 벽지에 달라붙는 역사의 지느러미 반쪽이 떠다니곤 했다 잔이 부딪치면서 잔이 넘치고 접시끼리 부딪치면서 접시가 넘치는 현장 아랫목에선 핸드폰이 몇 번씩 울리다가 끊어졌다

 

 누군가 문 밖으로 사라지는 찰나였다

 

정신과 표현 2000. 9-10월호

 

 


 

 

유병근 시인 / 소낙눈

 

 

낯선 길은 낯익은 길을 까먹고 어제 그 골목을 지웠다 낯익은 길은 낯선 길을 까먹고 오늘 그 골목을 지웠다 낯선 바람과 낯익은 바람 변두리에서 탈을 쓰고 웅성거리는 마을이 띄엄띄엄 지나갔다 강변마을에서 강변마을로 주저앉는 날이 있다 낯선 개산초나무와 낯익은 개산초나무를 돌아보는 눈에 나무의 결이 자꾸 흐리다 흑백필름이 헛돌고 있다 날이 저물고 낯선 얼굴과 낯익은 얼굴은 어깨 찌그러진 실루엣 틈새로 기울고 있다

 

시집 <소낙눈> 중에서-

 

 


 

 

유병근 시인 / 그렇다와 아니다

 

 

이것이 어떻게 그것이 되는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쌓여

그것이 되는 것을

비로소 눈치 채고 있다

이것 아닌 그것은

그것의 움막으로 가고

낯설다 하는 것을 까맣게 까먹었다

한 번 더 이름을 불러본다

이름이 거듭 낯설다

어쩌다 보니 그렇다

한 번 더 아니다

하얗다와 검사의 틈새가

거듭 헷갈린다

아마 그런 것 같고 그렇다

그렇다와 아니다의

중구난방이 입을 닫는다

 

*유병근 시인 추모 특집 |유고시

 

계간 『사이펀』2021년 가을호에서

 

 


 

 

유병근 시인 / 이백십 밀리의 꽃대

 

 

 누가 두고 간 화분이 지금 막 꽃대를 올리고 있다 이백십 밀리의 꽃대가 키를 높이 세우는 신발장 안에는 다른 것은 없고 꽃대를 자랑하는 화분만 있다 화분대에 아무도 신발을 올리지 않는다 화분대에 아무도 구두숟가락을 올리지 않는다 신발장이 화분대가 되기까지 이백십 밀리의 꽃대가 쑤군쑤군 꽃대를 뽑아올리고 있다 나는 화분대의 변두리를 쓸고 닦아준다 신발의 코에 광을 내던 일이 떠올라 한참 꽃대를 보고 있다 광을 낸 꽃대가 나를 보고 있다 신발장이 화분대가 된 용도 변경을 당분간 입 다물고 있다 투표일은 며칠 남지 않았다

 

-유병근 詩 「포엠포엠」2012 가을호

 

 


 

 

유병근 시인 / 검은 허방 찾아가네

 

 

1

 회오리도 아닌 것이 돌아다녔다 육이오와 사일구의 끈에 매달린 고무신 한 짝 부황 든 허공에 떠 있었다 산비탈 돌팍에 이마 문지른 귀때기 새파랗던 날 걸려 있었다

 

2

 바람아 구름아 짚어 보았다 때론 돌팍에 머리를 찍었다 썩은 나무등걸에도 찍었다 찍다가 훔쳐본 하늘 거기 떠 있던 물새 혓바닥 같은 희고 파르스름한 낮달 그 속내를 쓰다듬었다 발길에 꺾이고 또 쓰러지는 악다구니, 볼 비비며 쓰다듬었다

 

3

 아직 덜 자란 피는 이빨로 물어뜯는다 뜯은 피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준다 더 크게 뜯긴 것은 찍어낸다 뜯은 피 다스리는 마우스가 되어 숨은 피의 속사정에 눈 껌벅거린다 천적이 된다 요 고방 저 고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마우스, 오랜만이라고 피 한 점 뜯어내어 서로 볼 비빈다

 

4

 후라이팬 바닥에 해바라기 한 송이 핀다

조간을 읽다말고 해바라기 꽃잎에 포크를 댄다 넥타이를 매었다 후라이팬 중심에서 숙성되는 해바라기, 열 받친 씨알이 톡톡 튄다 티스푼으로 커피를 저었다

(곳에 따라 비, 천둥번개도 이따금 치겠습니다)

 

5

 손바닥으로 옴팍 감싼 어금니 저기 가네 귀밑볼 쑤시는 엄동설한을 지나 문턱을 지나 찌그러진 깡통처럼 녹슨 길바닥 저기 가네 드릴로 날카롭게 지지고 볶던 안달 저기 가네 석고처럼 엉겨붙는 톱니소리, 때묻은 해골 저기 가네 무시로 나불대던 입씨름 저기 가네 시린 이빨 짓누른 어둠 저기 가네 그게 길이었는지 길을 가로챈 천둥벼락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허방 찾아가네

 

 


 

유병근 시인(1932~2021)

1932년 경남 통영시 출생. 6·25 전쟁 직후 부산으로 옴. 1954년 고석규 김규태 김춘수 조영서 최계락 시인과 '신작품' 동인 활동을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70년 <월간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공식 등단했다. 시집 <어깨에 쌓인 무게는 털지 않는다> <어쩌면 한갓지다> <통영벅수> <까치똥> 등의 시집과 수필집 <허명놀이> <이런 핑계> 등 많은 책을 냈고. 최계락문학상, 부산시문화상, 현대수필문화상 등을 받았다. 2021.04.23 별세(향년 9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