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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희 시인 / 무덤을 좋아하는 여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3.

양희 시인 / 무덤을 좋아하는 여자

 

 

날마다 마른 꽃을 새 꽃으로 바꾸는 여자

둥근 머리에서 잡풀을 뽑아주는 여자 무엇이 잡풀이 되는지

무엇이 꽃풀이 되는지 너무 잘 아는 여자

 

무덤을 열고 한 남자가 밖으로 걸어나와 주기를

오랜 세월 기다리는 여자 휘파람 바람이 지나갈 때 풀잎처럼

가만히 눕는 여자 검은 코트 검은 치마가 차르르

바닥으로 펼쳐지는 카펫같은 여자 밟혀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

납작하고 푹신한 여자 답답한 여자

 

그러나 가슴에 손을 넣으면

따뜻한 무덤 두 개를 저 혼자 키우고 있는 여자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오늘도 세상 모든 저녁 노을을 불러모으는 여자

 

 


 

 

양희 시인 / 거울

 

 

그 사람을 부른 게 바로 나였을까

많은 사람들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

그저 그런 도시와 거리와 집 사이에서

 

미친 건 아니었는데

오직 그 사람을 불러 들일 생각만으로

꽃을 피우고 바람을 모으고

할 수 있는 모든 기운을 다 모아

해를 띄우고 달을 띄워서

그대와 내가 한번만이라도 마주칠 수 있기를

오랜 시간 노력

 

끔찍히도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까 내 가슴

술을 부어도 취하지 않는 가슴

속 거울을 봐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거리에

지난 시간을 가로수처럼 촘촘히 심고

등을 밝히고 그 아래 앉아서

기다림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손을 뻗어도 물처럼 풀어지지 않는

딱딱한 거울

속에 갇혀

 

 


 

 

양희 시인 / 오렌지

 

 

오렌지는 너무 생각이 많아요 누가 먹거나

먹지 않거나 썩게 내버려두거나 아무

관심없이 머리를 몸 안으로 밀어넣고 자기한테만

온통 집중하면서 아주 둥글둥글해졌어요 귀여운

오렌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알고 싶으면

오렌지 껍질에 난 백만 개의 시큼한 숨구멍을 다 통과해보고

오렌지를 반으로 쩍 갈라 톡톡 터지는 생각의 방문을 열어보고

삼박사일 숙식해보고 손만 갖다대도 기다렸다는 듯

잘 터지는 방이 대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아야 겠지만

내가 오렌지의 작은 알즙 방 속 하나에 몰래 들어가

흰곰팡이처럼 앉아 있어도 오렌지는 신경도 안써요

왜냐하면 오렌지는 바쁘니까 달콤새콤 생각만으로도

지나치게 벅차니까 오렌지는 비싸기도 하고

반짝세일로 저렴할 때도 있지만 그건

오렌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랍니다 오렌지가

길고 긴 생각 끝에 드디어 제 몸 속에서 머리를 쑥 빼내고

당신얼굴을 말똥말똥 오렌지처럼 쳐다보는 날이 오긴 오겠지만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어려운 오렌지를

한번도 이해해보지 못한 채 알알이

주머니 속 시간만 톡톡 다 터지고 말겠어요

 

1996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양희 시인(본명: 梁銀英)

1969년 경기 화성 출생. 1996년 <문학정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