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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종찬 시인 / 저녁 연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3.

송종찬 시인 / 저녁 연기

 

 

굴뚝을 빠져 나온 연기들이

날개도 없이 언덕을 넘는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목소리는

대밭 사이로 연기가 지나가는 소리

밥짓는 냄새가 장독을 깨우고

 

눈 덮인 초가 뒤로 사라지는 전라선 기차

오늘도 내 새끼는

밥자리 잃지나 않았을까

 

지붕만 남은 강 건너 외딴 집

굴뚝을 따라

가는 연기 한 올 관절도 없이 산을 넘는다

 

 


 

 

송종찬 시인 / 모닥불 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남기고 간 모닥불 주위에 앉아 대성리 근처 하얗게 쇠버린 나무들을 뒤적입니다. 나의 사라짐도 저렇듯 작은 사랑을 환히 밝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름한 야전상의를 걸치고 외로움을 달래던 강가에 서니 강물은 십 년 전 기침소리처럼 흘러갑니다. 마음속 희미한 불씨 위에 그날의 반파된 꿈들을 쓸어넣습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끝없는 논쟁에 막차를 놓치고 강당에 들어가 잠을 자던 밤. 타닥타닥 불꽃을 내며 다시 불길이 커지고 멀리 산의 손금이 드러납니다. 이렇듯 찍히고 썩은 나무 등치 같은 날들이 하늘을 가르는 힘이 될 수 있다니 문득문득 발을 걸어왔던 아픔들이 땔감처럼 스며들어 텅 빈 마음을 비춥니다. 솔방울을 줍고 꺾인 가지를 찾아 피워야 할 모닥불, 그리하여 낯모르는 이가 내 곁을 지나다 한줌 불꽃을 향해 젖은 손을 내밀며 다정하게 머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무슨 순교자처럼 막걸리를 토하던 대성리 근처 아 밤은 깊고

 

시집 '그리운 막차' 중에서

 

 


 

 

송종찬 시인 / 톱밥난로

 

 

가구가 되지 못한 꿈들이 탄다

미송 나왕 결 고운 것들

모두 서울로 팔려나갈 때

등 굽은 양날톱에 나이테가 잘려

기러기처럼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너희들의 꿈은 얼마나 춥겠냐고

강바람이 빈속을 적시는 마을 도서관

한 뼘의 그리움도 전하지 못하는

남은 자들의 부끄럼을 태우며

지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의

목숨이 탄다

 

<송종찬 시집 '그리운 막차' 중에서>

 

 


 

 

송종찬 시인 / 땅끝마을

 

 

 땅끝마을에 이르면 정말 끝이 보일까. 비좁은 세상 속에서 수없이 끝을 외쳤네. 외딴 집들이 이따금 빨간 신호등을 켜는 밤 검은 필름을 돌리듯 차를 몰았네. 보성 강진 소읍의 이름들이 점―점 나타났다 사라지고 생의 필름이 끝나는 곳에서도 빠르게 지나쳐온 삶의 골목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파도가 자막처럼 흔들리고 있었네. 팽나무 우거진 사자봉에서 바라본 바다, 산은 섬으로 밤은 낮으로 이어지며 땅 끝은 時空(시공)의 끝이 아니라 내가 달려온 速度(속도)의 끝이라고 파도는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네. 나는 무엇을 위해 밤새 달려왔던가. 나는 너무 쉽게 시작을 생각하고 지나쳐온 산과 들이 그리워졌네.

 

 


 

 

송종찬 시인 / 그리운 막차

 

 

사랑할 때 나는 매일 막차를 탔다

차창에 기대어

전주에서 부안까지

솜처럼 연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

 

조금 조금만 하다가 막차를 놓치고

낡은 수첩을 뒤적일 때

그러나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까지

막차는 어서 오라 손짓했다

 

한여름의 폭우 속에서도

막차는 반딧불 같은 라이트를 켜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갔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달려

막차는 집도 없는 종점에서 잠이 들었고

찬 이슬 새벽 첫차가 되어

해를 안고 내 곁을 떠나갔다

 

 


 

 

송종찬 시인 / 장미공장

 

 

사람에게

한 송이 장미는

풍경이지만

벌에게는

밥벌이를 위해 구슬땀을 흘려야 하는

공장이라네

해가 뜨면

벌들은 작업복을 갈아입고 출근하고

해가 지면

꿀통을 지고 귀가한다네

뙤약볕 아래서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며

겨울을 준비하는 노동

날카로운 톱니가 달린

장미의 생산라인을 바라볼 때

한 방울의 꿀은 신성하다네

비가 내리거나

꽃을 꺾어

공장을 폐쇄할 때

월급을 기다리는

일벌들의 가족들이여

벌들의 일터는

향기가 머무는 부지에서부터

시작되고

한 송이 장미는

기름냄새 가득한

공장

 

 


 

송종찬 시인

1966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전주에서 성장. 1992년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외 9편으로 작품활동 시작. 1999년 시집 <그리운 막차>. 2007년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