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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원동우 시인 / 이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2.

원동우 시인 / 이사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지하 네평 방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석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안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

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서랍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밭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참

장판 밑에 장판 밑에

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

강을 건너 이제 마악 변두리로

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

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

쉽게 살아지는 것임을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1993년 세계일보]

 

 


 

 

원동우 시인 / 기원에 관하여

 

 

물소의 목을 물어

단번에 숨을 끊는 사자도

자동차보다 빨리 달린다는 치타도

설산의 숲을 지배하는 호랑이도

모두

고양잇과에 속한다지

 

베트콩 수백 명을 죽였다던

군복 입은 늙은 사내와

하느님도 벌준다는 마이크 든 목사와

대통령을 하겠다 나선 인사들 모두

그래

유인원 후손이라더라

 

왜 그랬을까, 힘세고 높은 것들

빛나는 놈들 대신 작고 약한 놈들

볼품없는 존재를 맨 위에 적은 사람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ㅡ『시인수첩』(2021, 가을호)

 

 


 

 

원동우 시인 / 고물상 화엄경

 

 

속내를 감추고서야

이곳에 올 수 없다

 

금 가고 깨지고 꾹꾹 밟혀

납작하게 온몸이 짓눌린 것들

누군가의 가슴에 박혔던 대못과

전선처럼 복잡하게 얽힌 심사라야

그 일생에 값이 붙는다

 

어쩌다 멀쩡한 녀석이 온 적도 있었다

비닐 포장을 벗지 못했다면

쓴맛 단맛 세상을 모르는 법, 가거라

좀 더 살다 오너라

툭툭 먼지가 털려 쫓겨났다

 

둥글게 등이 말린 노파가

파지를 내려놓고 돌아간 무렵

 

고물을 걷어 오는 화물차에

철불 머리 하나 실려 있다

일꾼들이 어쩔까 손 놓고 보는데

일생 절 받던 지체 높은 쇳덩이

은은하게 눈을 뜬다

 

전력을 다해 살아본 생들만

가늠할 수 있는 화엄의 세계

본디 자리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천천히 불국토를 둘러본다

 

 


 

 

원동우 시인 / 고트프리트 벤*이 지나친 풍경

 

 

골목

어두운 창들

잎이 진 나뭇가지

젖은 하늘

저녁 새벽 같은

 

모퉁이

팔 없는 고무 인형

다시 모퉁이

깨진 항아리

핏물 흐른 자국

붉고 검은 의자

 

낮은 찬송가 소리

노인들

더러 아이들

높고 차가운 십자가

 

검은 봉지를 든 뚱뚱한 여자

담배를 문 교복 소녀

폐지 줍는 노파

그 곁에 장바구니를 든 젊은 여자

툭 떨어지는 생선 머리

 

부동산 중개소 대머리 남자

편의점에서 조는 청년

슬리퍼를 신은 남자 경찰관

그 옆을 스치듯 개에 끌려가는 노인

급하게 멈추는 자동차들

 

골목

벽 혹은 담장

걷지 않은 빨래들

모두의 머릿속에 사는 쥐

 

* 고트프리트 벤(1886~1956) : 독일 시인이자 의사. 새로운 문체와 형식만이 시를 구원한다고 주창.

 

-계간 시 전문지 《포지션》 2018년 봄호

 

 


 

 

원동우 시인 / 끈에 관하여

 

 

우주가 끈으로 되었다는 말이 좋았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도 설명하지 못한 것을

끈 이론*으로 풀었다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조카가 해산했다는 연락을 받고

아기를 보러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그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우주는 여러 겹의 차원이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설명을 마친 늙은 물리학자가

정중하게 인사하는 모습도 맘에 들었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다는 말

그 말이 다행스럽고 안심되었다

 

유리창 앞으로 안겨온 녀석

조카 손주가 예뻐서 우리는 웃었다

한둘은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그때

버둥거리던 녀석이 배꼽을 드러냈다

 

가늠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우리에게로 이어져온 끈의 흔적

차원을 건너오는 동안

손금 생기도록 움켜쥐었을 운명의 증거가

도톰하게 남아 있었다

 

우주가 끈으로 되었다는 말

왜 그런지 알 수 없다는 그 말이 좋아서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잠깐 울었다

 

* 끈 이론 : 우주의 최소 단위를 진동하는 끈으로 보는 물리학 이론.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7년 1월호

 

 


 

원동우 시인(원명 원동오)

1963년 경기 가평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 대학졸업 후 은행에 입사하여 10년 정도 근무하다가, 퇴사한 뒤에는 벤처기업을 운영하다가 정리하고 취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