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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환 시인 / 만종(晩鐘)
호박엿 파는 젊은 부부 외진 길가에 손수레 세워놓고 열심히 호박엿 자른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고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 그을린 사내 얼굴 타다 만 저 들판 닮았다 한솥 가득 끓어올랐을 엿빛으로 어린 아내의 볼 달아오른다 잘려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들이 꿈꿔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삶의 조각들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들이 잘라내는 적막한 꿈들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
시집『발자국들이 남긴 길』(2000) 수록
고창환 시인 / 선인장
선인장이 사막 식물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선인장이 또한 목마른 식물이란 것은 아무도 모른다 목마른 것들은 모두 거칠어진다 내심 감춰둔 열망이 깊을수록 온몸의 가시는 무성해지는 법 마른 목구멍의 갈라지는 틈새는 뜨거웠던 세월의 흔적인 것이다 기실 모래바람 자욱한 세월 속에선 속으로 키워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가 선인장이 붉은 꽃잎을 피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갈증을 참아야 하는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 향기가 세상을 진동하려면 몇백 번의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하는지
고창환 시인 / 투신
먼지 낀 유리창에 사내의 얼굴이 비쳤다 늙은 경비원은 졸고 빈 계단은 그늘 속으로 뻗어 있다 고통스러운 추억처럼 침묵은 완강하다 이 낯선 계단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소모되었다 길이 끊어진 곳에 길이 열린다 손을 뻗으면 문이 사라진다 짧은 햇빛이 쓰다듬고 간 자리, 덜컹거리는 발자국들이 서성거렸다 힐긋거리며 검은 새가 깃털을 흔들며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깜박거렸다 세상의 모든 신호는 음험하다 그러나 모두 기억하리 이미 많은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 붉은 꽃잎이 시들고 있는 화단 옆, 웅성거리던 발자국들이 흩어져 갔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저 꽃잎은 무엇을 향해 견디고 있는가 왜 젖혀진 창문은 흔들리지 않는가 창문을 가득 메우며 뭉게구름이 밀려들어 왔다 빈 창문은 아무것도 가려주지 못한다
고창환 시인 / 나뭇잎들
느닷없이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빗방울들 무리 지어 흐린 유리창을 두드리는 오후 나뭇잎들은 도무지 싸울 생각을 않는다 바람은 거친 손을 흔들고 웅성거리는 나뭇잎들 저렇게 떨어져도 되는가 차고 투명한 숨결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한때는 아름다웠을 젖은 얼굴들 늦가을 바람은 낮은 세상을 떠도는데 마지막 숨결까지 흙바닥 아무렇게나 뒹굴어도 되는가 저렇게 흩어져도 되는가
고창환 시인 / 오월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향수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주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 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날까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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