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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강희 시인 / 염소에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2.

유강희 시인 / 염소에게

 

 

해질 녘이나

바람 부는 날엔

아기 염소들은 비탈진 언덕에 발을 딛고

學習하듯 쓴 풀을 뜯으며

매애매애 하고 울음을 짠다.

필시 우는 기술 하나는 기막히게 타고난 듯

애잔하고도 애닯게 그것들은

울음도 한꺼번에 크게 쏟지 않고

조금씩 찔찔 흘리며 눈물을 아껴 운다.

눈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저이들끼리

생뿔을 부딪쳐 쩔쩔 피 흘리며

매애매애 울기도 한다.

매일 누가 죽는지, 슬픈 일이 있는지

검은 상복을 입고 그렇게 속세의 언덕을 누비는 것이다.

 

 


 

 

유강희 시인 / 쇠박새

 

 

그것은

잠수함처럼 조용히 내게 왔다

이른 겨울 아침 무슨 구조 신호처럼

간신히 울음을 끄집어내더니

먼 하늘을 향해 힘껏 쏘아올렸다

하지만 번번이 멀리 나아가지는

못하고 흐린 공기 방울 몇 개만

피시식 겨우 터뜨릴 뿐이었다

구하러 오는 이 아무도 없었다

잎 떨군 이 작은 나무 위에서

그것은 붉은 눈의 토끼처럼

죄 없이 폭발할 순간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문학동네, 2018년.

 

 


 

 

유강희 시인 / 스무 살 라일락

 

 

라일락, 구름의 주소가 많은 스무 살

저 나무는 어디를 건너왔나

땀방울이 몽글몽글 피어났네

향기가 수치가 되는 날들 지나왔네

지치지도 않은 절망,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햇볕의 상처를 보여주는

모서리 딛고 네가 걸어오네

내 앞에서 한번 웃어주지 않겠니?

내가 열 수 없었던 눈물의 섬들

봄비가 대지의 틈을 꿰매듯

라일락, 너무 많은 모음과 자음

나는 어떻게 저 위를 지나가나

설움을 풀어내는 맷돌을 베고 누워

어젯밤, 두더지를 삶아먹었다는

여자의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그런 말을 중얼거리듯 피어 있는

라일락, 다시 돌아오지 않는 스무 살

 

-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유강희시인, 문학동네,

 

 


 

유강희 시인

1968년 전북 완주 출생.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불태운 시집', '오리막' 동화집 '도깨비도 이긴 딱뜨그르르'. 동시집 '오리발에 불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