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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희 시인 / 염소에게
해질 녘이나 바람 부는 날엔 아기 염소들은 비탈진 언덕에 발을 딛고 學習하듯 쓴 풀을 뜯으며 매애매애 하고 울음을 짠다. 필시 우는 기술 하나는 기막히게 타고난 듯 애잔하고도 애닯게 그것들은 울음도 한꺼번에 크게 쏟지 않고 조금씩 찔찔 흘리며 눈물을 아껴 운다. 눈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저이들끼리 생뿔을 부딪쳐 쩔쩔 피 흘리며 매애매애 울기도 한다. 매일 누가 죽는지, 슬픈 일이 있는지 검은 상복을 입고 그렇게 속세의 언덕을 누비는 것이다.
유강희 시인 / 쇠박새
그것은 잠수함처럼 조용히 내게 왔다 이른 겨울 아침 무슨 구조 신호처럼 간신히 울음을 끄집어내더니 먼 하늘을 향해 힘껏 쏘아올렸다 하지만 번번이 멀리 나아가지는 못하고 흐린 공기 방울 몇 개만 피시식 겨우 터뜨릴 뿐이었다 구하러 오는 이 아무도 없었다 잎 떨군 이 작은 나무 위에서 그것은 붉은 눈의 토끼처럼 죄 없이 폭발할 순간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문학동네, 2018년.
유강희 시인 / 스무 살 라일락
라일락, 구름의 주소가 많은 스무 살 저 나무는 어디를 건너왔나 땀방울이 몽글몽글 피어났네 향기가 수치가 되는 날들 지나왔네 지치지도 않은 절망,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햇볕의 상처를 보여주는 모서리 딛고 네가 걸어오네 내 앞에서 한번 웃어주지 않겠니? 내가 열 수 없었던 눈물의 섬들 봄비가 대지의 틈을 꿰매듯 라일락, 너무 많은 모음과 자음 나는 어떻게 저 위를 지나가나 설움을 풀어내는 맷돌을 베고 누워 어젯밤, 두더지를 삶아먹었다는 여자의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그런 말을 중얼거리듯 피어 있는 라일락, 다시 돌아오지 않는 스무 살
-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유강희시인,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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