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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일 시인 / 시든 손가락
어느 날 아내는, 시든 잎처럼 툭 떨어진 제 손가락을 주어 들며 말했어.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마른 손가락이라도 사진첩 갈피에 고이고이 눌러두었다가 좋은 날이 오면 반 돈짜리 금가락지 꼭 끼워달라고. 거리를 걷다가도 캔 뚜껑 꼭지만 보면 손가락에 끼워 보려던 아내. 유난히 반지를 좋아했지만, 늘 땅을 일궈야 했던 굵은 손마디엔 반지를 낄 수 없었지. 토끼풀 뜯어 풀꽃 반지 묶어 줄 때 희미하게 웃어보던 아내. 아내는 풀꽃 반지가 시들 때마다 손가락이 저리다고 말하곤 했지. 철 지난 달력처럼 아내의 생명이 몸에서 조금씩 뜯겨지던 날, 아내는 보름달을 보며 금가락지 같다고 말을 했었지. 설핏 맺힌 눈물에 보름달이 있더군. 속이 다 타서 까맣게 변해버린 보름달이 아내에겐 평생 끼워보지 못한 반지로 보였던 게야. 한 줌도 안 되는 아내를 마을 뒤산 언덕에 눕히고 돌아오던 날, 사진첩 갈피에 눌러두었던 아내의 손가락을 안아 들었어. 남은 부조금 몇 푼으로 아내의 반지를 맞춰주기 위해. 하지만, 사진첩에 눌려 납작해진 아내의 손가락에 둥근 가락지는 낄 수 없었어.
무덤가엔 사철 토끼풀만 무성하고, 아내가 보았던 속이 다 탄 보름달 지는 날이면 가슴보다 먼저 손가락이 욱신거려 도통 글 한줄 적지 못했다. 아마도 아내를 묻은 내 손가락에 아내가 수갑을 채워놓고 있었나 보다.
김두일 시인 / 굴비
물 속에 자유로이 숨쉬던 아가미를 풀어헤친 후 맑은 물로 주검을 씻고서 조사를 읽노라
너의 살, 한 점 한 점 그 속에 담긴 사연 오래도록 썩지 말라고 몸 전체에 골고루 소금을 뿌려 옹관에 고이 담아 삼일장을 치르노니
채반 위에서 부활을 꿈꾸는 동안 너는 바람으로 바다를 품고 있다
죽어서 더 추앙 받는 굴비여 하지만 바람의 가시 사이에도 네 놀던 바다는 흔적조차 없구나
김두일 시인 / 은혜로운 골목
평생, 남의 집 한 귀퉁이를 사글세로 떠돌다가 하늘로 이사 가신 아버지 거기엔 집 한 칸 있더이까? 아비가 가난하면 아들도 가난한 살얼음의 땅에서 방 한 칸 장만하자고 밤낮으로 몸을 팔아도 바람에 너무 쉬 마르는 땀으로는 기둥을 세울 수 없었더랍니다. 구세군 종소리가 울리는 거리에서도 네온은 무심히 밤을 휘젓고 신발이 없는 사람들, 얼음 박힌 발로 종종 걸음을 걸어야 했던 거리는 그나마 주인을 묻지 않았기에 자비롭습니다. 반 지하 세 방을 벗어나서 기뻐하던 아내의 웃음에 곰팡이가 필 무렵 낮에도 종일토록 달이 창백하고 여전히 문패 하나 걸어놓을 담 한 뼘이 없습니다. 어느새 지붕보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이 천정 위로 목을 빼고 주위를 둘러봐도 아이의 하늘은 지붕보다 낮게 걸려 방구들만 자꾸 땅 속을 파고듭니다. 아버지, 거기에 마련한 집칸은 따뜻한가요? 종일토록 바람이 웅웅대는 이 골목엔 봄이 오기 전에 꽃 보다 먼저 조등弔燈이 문설주에 피어나고 오래된 사람들이 산으로 가 누웠습니다.
어제도 밤새 눈이 내려 조등 위에 쌓였습니다. 조등 아래서 아이들이 하루살이 처럼 모여 주소가 없는 이 땅 위에 주소 쓰는 법을 밤새 배웠습니다. 이 골목이 아직은 은혜롭습니다. 아버지.
김두일 시인 / 목어의 노래
물을 닮고 싶어 한평생 물처럼 떠돌다가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번도 본 일 없는 아름다움에 나는 화들짝 놀라 외려 당신에게서 멀어집니다. 당신은 어부의 아내랍니다. 날이 밝으면 그물을 엮고 별이 내리면 물고기와 별빛을 낚는답니다. 당신에게 잡히고 싶은 나는 날마다 그물 속으로 몸을 던졌지만 성긴 씨줄과 날줄 사이로 작은 몸은 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때마다 갈 수 없는 절망으로 생명은 비늘처럼 벗겨졌습니다. 물에서 흘리는 눈물은 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신께 가기 위해, 밤마다 달빛 별빛 어려 있는 비늘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물안개 고운 어느 새벽, 설핏 잠든 당신에게 우아하게 헤엄쳐 가 발 아래 몸을 뉘고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나를 보고 魚網에 넣습니다.
살점 발라내고, 내장 다 솎아내어도 한없이 좋았습니다. 상위에 오르는 회가 되고 찌개가 되어 당신 안에서 썩어져도 좋았습니다. 모조리 들어낸 빈속엔 사랑으로 채우고 바싹 마른 거죽만은 산 깊은 절 추녀 끝에 목어로 살아남아 당신 향한 노래를 때마다 부를 수 있으면 좋았습니다. 심장 보다 더 큰 울림으로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 몰라도 좋습니다. 나, 부르는 노래가 당신 영혼을 두드리지 못하고 바람소리, 새소리에 묻힌다 해도 당신의 귓전에서 날마다 환생하는 목어의 노래이면 좋습니다.
당신은 연못에서 그물을 또 드리웁니다. 난 속이 텅 빈 껍데기라도 당신에게로 헤엄쳐 가고 싶어 혼백을 울려 노래를 부릅니다. 둥둥 당신을 부릅니다.
김두일 시인 / 아름다운 당신
알맹이는 밖에 두고 껍데기만 귀가했던 나를 당신 앞에서 참회합니다.
방황했던 날들에 대한 모든 이유을 아내의 의부증 탓으로 돌렸던 나의 비겁함을 당신 앞에서 참회합니다
아내가 몹쓸 의부증을 앓게된 원인이었던 장인의 젊은 시절의 바람기를 원망하고 소원하게 굴었던 나의 소심함을 당신 앞에서 참회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을 앗아간 원수마저 사랑하였건만 티끌보다 작은 불편함을 내게 초래했다는 이유로 들보보다 큰 원망으로 내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살인을 저지른 나의 악행을, 당신 앞에 엎드려 참회합니다
나의 참회가 머리로 하는 참회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참회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불로 흔적도 남지 않게 모든 원망과 미움, 갈등과 다툼을 태우시고 타고 남은 재는 사랑을 피우는 거름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오셔서 나의 참회를 들어 주소서 내 주인되신 아름다운 당신
김두일 시인 / 아내의 생일
생일이라고 들뜬 아내에게 깜짝 선물을 하고 싶어, 아내가 며칠 전에 벗어 장롱 속에 감춰둔 속옷을 꺼내 빨았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후크가 너덜대는 브레이지어와 잔 구멍이 숭숭 뚫려 거미줄처럼 얇아진 팬티. 그토록 오래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아내가 저런 속옷을 입고 사는지 모르고 산 무딘 손이 비누를 벅벅 문질러댔다. 수돗물을 틀지 않았는데도 속옷이 젖고. 시장에서 악착같이 값을 깎던 아내의 힘이 저기 숭숭 뚫린 구멍을 지나 나온 것 같아 늑골이 묵직했다
자꾸 고관절이 아프다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보던 의사는 골다공증이라며 구멍이 숭숭뚫린 아내의 뼈사진을 보여 주었다. 뼈에 뚫린 구멍들을 자세히 보니 사나운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아들녀석이 한 입씩 베어문 흔적 옆에 승냥이보다 더 예리하게 뜯어낸 내 이빨자국이 무수하게 널려있었다. 깊은 밤에 마시고 버린 술병이 아내의 뼈속에서 파편처럼 박혀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는 수렵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날, 뼈에 좋다는 사골을 넉넉히 사고, 티비에서 광고해대던 속옷을 세트로 사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내는 바늘을 쥐고 앉아 너덜너덜한 속옷 구멍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속옷의 구멍이야 바늘로 깁지만 뼈에 난 구멍을 무엇으로 메우려는지. 한무더기 시간이 내 뼈속에서 휘파람을 불며 빠져나가는 오후. 뽀얗게 우러난 사골 국물속에서 아내의 허벅지 뼈 한덩이를 건져올렸다.
김두일 시인 / 푸줏간 여자
1 밤 새 무소를 몰아대던 사자가 배를 허옇게 드러내고 가죽으로 누워 있는 세랭게티 초원에서 21세기의 태양은 초식동물로 떴다. 아내들은 부지런히 남편의 자궁을 버리고, 여자가 되어 땅 위에 초경初經처럼 이름을 썼다
2 매일 숫돌에 갈아 세운 칼 끝 보다 예민하게 신경을 돋우던 여자, 돼지 한 마리를 눈 하나 꿈쩍 않고 포를 뜨고는 저울에 올려 근수대로 생을 셈하던 여자, 남편도 근수대로 셈을 하고는 살을 얇게 저며내던 여자, 눈가에 멍 시퍼렇게 물든 아침엔 다들 죽여 버리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던 그 여자, 사내 구실 못하고 빌빌대는 것이 아내가 드세기 때문이라고 수군대는 소리에 귀를 자르려던 그 여자. 어느 날, 몽둥이 들고 설쳐대는 남편을 고기처럼 썰어놓고 이내 따라 죽었다는데 일기장엔 삶은 부젓가락처럼 독한 것이라며 아침마다 독을 마셨다 써 있었네.
국립과학수사본부 검시보고서엔 그 여자 속엔 내장內臟이 없었다고 적혀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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