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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애경 시인 / 때밀이 아줌마는 금방 눈에 뜨인다
때밀이 아줌마는 때를 밀고 있지 않을 때도 금방 눈에 뜨인다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 속에서 검거나 빨간 비키니를 입고 있기 때문일까
안 쓰는 대야를 걷어다 한쪽에 치우고 있거나 좁은 침대에 벗은 여자를 누이고 땀을 흘리며 문지르고 있을 때도 때밀이 아줌마는 다른 여자들과 어딘지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때밀이 아줌마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때를 밀게 하는 여자들이 더 눈에 뜨였다 만삭의 임산부나 시들어 조그매진 할머니가 누워 있으면 마음이 놓였지만 좁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왜소한 때밀이 아줌마에게 살집 피둥한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게으르기도 해라. 제 몸의 때도 제 손으로 못 미나.'
살짝 끓는 물에 튀겨져 털을 밀고 있는 하얀 돼지 같기도 하고 잔돈푼에 노예를 산 거만한 마나님 같기도 하고 게다가 요구르트에 우유에 퍼런 오이 간 것에… 초라한 동네 목욕탕에서 몸에 범벅을 하고 있는 여자가 대저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제 나도 나이가 먹었나 때밀이 아줌마에게 신경이 쓰인다 집집마다 샤워 시설이 되어 목욕탕 손님이 줄어서 그런지 때를 밀고 있을 때보다는 느릿느릿 손님들이 쓰다 놓고 간 대야를 걷고 있거나 대기실 체중계 앞에 앉아 잡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목욕을 늘 혼자 가는 내가 아이들을 둘 달고 와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등 밀어 드려요?" 하니 그녀 등을 돌려대며 혼잣말처럼 "아줌마한테 등만 밀어달라고 할려고 했는데…" 하는데, 마음이 뜨끔하여 때밀이 아줌마를 힐끔 봤다
'오늘도 난 저 아줌마 일을 빼앗은 게 되었네', 하고.
양애경 시인 / 길 잃기
시간당 만 오천원짜리 야간 강의를 마치고 거리에 내려서면 갑자기 붙들 게 하나도 없어진다 밤 열시 사십분 오분 이쪽 저쪽이면 버스가 끊어지는데 생각할 수조차 없다 빈 머리로 지척지척 걷는다 가로등 속 골목은 노랗게 떠 있고 담장마다 버려진 듯 웅크리고 있는 자동차들
모퉁이에 젊은 남녀가 서서 눈을 내리깔고 손으로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함께 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다 그들의 인생에선 오늘이 중요한 날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면 나는 그 목격자가 되는 셈이고
무언가에 함께 엮어져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하면서 정류장에 서 있다 이마에 불을 달고 택시들이 좍 흘러오고 이어 그것도 그친다 버스를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택시를 불러 타고 사라진 후
혼자 거리를 바라보고 서 있다 기다리는 데 타성이 붙어버려 그런지 뭘 기다리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양애경시집『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중에서
양애경 시인 / 장미의 날
장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가지 위에 솜털 같은 가시들을 세우고 기껏 장갑 위 손목을 긁거나 양말에 보푸라기를 일으키거나 하면서 난 내 자신쯤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어요 라고 도도하게 말하는 장미의 기분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가위에 잘려 무더기로 쓰러지는 장미꽃들과 함께 축축한 바닥에 넘어졌다
- 시집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창작과비평사, 1997)
양애경 시인 / 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
우리가 사랑하면 같은 길을 가는 거라고 믿었지 한 차에 타고 나란히 같은 전경을 바라보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너는 네 길을 따라 흐르고 나는 내 길을 따라 흐르다 우연히 한 교차로에서 멈춰 서면
서로 차창을 내리고 ?안녕,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어 하고 말하는 것도 사랑인가 봐
사랑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계속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끈도 아니고
이걸 알게 되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 오래 고통스러웠지
아, 신호가 바뀌었군 다음 만날 지점이 이 생이 아닐지라도 잘 가, 내 사랑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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