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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동호 시인 /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1.

신동호 시인 /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

 

 

나의 어머니에게도 추억이 있다는 걸

참으로 오래 되어서야 느꼈습니다

마당에 앉아 봄나물을 다듬으시면서

구슬픈 콧노래로 들려오는 하얀 찔레꽃

나의 어머니에게도 그리운 어머니가 계시다는 걸

참으로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부르는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손은 나물을 다듬으시지만 마음은 저편

상고머리, 빛 바랜 사진 속의 어린 어머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의 둥근 등을 바라보다 울었습니다

추억은 어머니에게도 소중하건만

자식들을 키우며 그 추억을 빼앗긴 건 아닌가 하고

마당의 봄 때문에 울었습니다.

 

 


 

 

신동호 시인 / 봄날 강변

 

 

세월이 멈춰졌으면 하지 가끔은

멈춰진 세월 속에 풍경처럼 머물렀으면 하지 문득

세상이 생각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을 때일거야

세상에는 생각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을 때일 거야 아마

예전에 미처 감지하지 못해서가 아니야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너무나 빠른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분명

마음은 발걸음보다 항상 뒤처져 걷지만

봄날 강변에 앉아보면 알게 되지

머얼리 기차가 지나갈 때

눈부신 햇살 아래, 오래 전 정지된 세월의 자신은 얼마 나 아름다웠던가 순간

기차는 굴속으로 사라져버리고

강변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신은 떠나지만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을 게야 마음의 지조처럼

여전히 기다릴 게야 오래도록.

 

 


 

 

신동호 시인 /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며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 김주대 시인의 글을 읽으며 킥킥

그 고운 눈매를 떠올리다 보면 진보, 보수 잘 모르겠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그 일도양단이 참 대단하고 신기하다.

주대가 좋아하는 큰 엉덩이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을까? 싶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나는 존다.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술 먹자는 전화가 온다.

열 중 아홉은 진보적인 친구들이고 하나는 그냥 친구다.

보수적인 친구가 나에겐 없구나, 생각한다.

 

오후 여덟 시 나는 대부분 나쁜 남자다.

가끔은 세상을 다 바꿔놓을 듯 떠든다.

후배들은 들은 얘길 또 들으면서도 마냥 웃어준다.

집에 갈 시간을 자주 잊는다.

 

오후 열한 시 무렵이 되면 나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다.

어느새 민주주의와 역사적 책무를 잊는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돈을 벌고 싶고, 일탈을 꿈꾼다.

 

자정이 다가오자 세상은 고요하다.

개구리는 진보적으로 울어대고 뻐꾸기는 보수적으로 우짖는다.

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사상보다 삶이 먼저라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진보적일지 몰라, 하면서

대충 잔다.

 

- 시집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실천문학사,2014)

 

 


 

 

신동호 시인 /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미닫이가 닫힌 냉면집 앞을 한동안 서성였네

기울어진 간판이 요즘의 나같이 좀 모자라 보이는 것이

NLL이나 중국 어선 같은 건 그냥 육수로 끓여버릴 것 같았네

냉면 맛 또한 설핏하게 날 위로해줄 듯했는데

허리 굽은 아저씨는 잠시 황해도 고향에 갔는가 보네

바람만이 미닫이를 슬쩍 밀었다 제자리에 갖다 놓고 있었네

 

육수를 내던 자국만 담벼락에 붙어 고향 냄새를 풍겼네

병사들의 차는 잠시 속도를 줄이면서 굴뚝을 보았네

주인의 부재는 천안함처럼 의문만 남기고

눈치 빠른 병사들이 남긴 바큇자국 위로 개 한 마리 지나갔네

노를 저어 잃어버린 맛을 찾아갔는가 보네

장촌냉면집 지붕이 자꾸 낮은 포복을 하고 기어갔네

메밀꽃처럼 눈이 내리는데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바다가 물러난 사리 갯벌 어디에서 개불을 잡고 있을까

까나리액젓은 현무암 빛깔로 곰삭은 맛을 내고

인생도 물냉면 사리처럼 물컹해져 버렸는데

혹시! 아무도 가지 않는 방공호를 돌아보고 있단 말인가?

텅 빈 길 위에서 나 혼자 분단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네

 

 


 

 

신동호 시인 / 춘천역

 

 

노을이 비껴 앉아 있었다 거기에선

무료한 사람들의 세월이

떠나지도 도착하지도 않은 채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뭔가

내 청춘의 십 년은 내내

안개로부터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던가

문득 옛 친구의 낯익은 얼굴을 만나고 돌아서면

비로소 기억 저편에 놓이던 추억

내내 앞만 보며 달리던 동안에도

묵묵히 세월과 더불어 낡아지던 풍경들

그 오랜 것들은 아름답던가 추억은

아련하다 새벽거리를 쓸던 이웃들의 얼굴도

나는, 머리를 쓰다듬던 그들의 손길로 자라지 않았던가

이내 마음속에서

혁명이란 이름으로 인해 소홀히 해선 안 되었을 것들

떠오른다 거기에선

홀로 돌아오는 어머니, 아들을 남겨두고

감옥담장을 자꾸 뒤돌아보며 가슴 저미던 어머니

안개 속에 눈물 감추고

노을과 함께 앉아 있었다.

 

-- 시집 《저물 무렵》(문학동네, 1996)

 

 


 

신동호 시인

1965년 강원도 화천 출생. 1984년〈강원일보〉신춘문예 당선, 1992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 시집 『겨울 경춘선』『저물 무렵』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산문집 『유쾌한 교양 읽기』『꽃분이의 손에서 온기를 느끼다』『분단아, 고맙다』.